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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37

6. 조선 후기 성곽 공방전 양상 우리나라 성곽 공방전에 관해서 2020년 5월부터 6월 30일까지 history-talk.tistory.com에 연재했었다. 그러나 ‘조선전기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2)’를 끝으로 블로그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회를 올리지 못한 채 많은 시일이 지체되었다. 뒤 늦게 새 블로그 historyof.tistory.com에 마지막 회를 올려서 마무리 지어려고 한다. 애독자의 많은 양해를 바란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을 통해 화약병기인 조총(鳥銃)의 위력을 체험했다. 이를 계기로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명나라 남병(南兵)의 단병전술(短兵戰術)을 도입하여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후에 여진족의 남침을 당해서는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북침에 대비한 .. 2023. 10. 22.
격동의 19세기 조선(24:끝) - 실권자 흥선대원군 하야 1866년 병인사옥 이후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면서 조선 조정의 대외정책은 강경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따라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는 재야 유림세력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급기야는 조정의 또 다른 강경세력과 제휴함으로써 자신들의 강화된 발언권으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해나갔다. 1873년 윤 6월 성균관 유생 이세우 등이 흥성대원군에게 ‘대노(大老)’의 존호를 올리자고 상소했다. 그러나 11월 이항로의 제자인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로 맞불을 질렀다. 재야 유림세력은 앞서 1865년(고종 2) 철폐된 ‘만동묘’를 복원하도록 주장하여 조정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1874년 7월 만동묘를 중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1592) 때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하여 도.. 2023. 7. 15.
격동의 19세기 조선(23) - 조선의 강경세력 득세 조선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서구 열강의 침략세력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자구적 논리가 ‘위정척사’였다. 그 행동 방략이 ‘척양’과 ‘척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페르트가 1880년 저술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에서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절박한 위기에서 쉽사리 벗어나게 되자 자신들도 놀랄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 말이 당시 조선 지도층의 인식을 잘 대변해 준다. 이는 곧 자부심으로 연결되었고, 서구 세력에 대한 강경정책으로 나타났다. 조선은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을 복고한 후 국교 재개를 요청했을 때 국서에 찍힌 도장의 형식이 이전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해 버렸다. 1870년 6월 초 독일 군함 헤르타(Her.. 2023. 6. 20.
격동의 19세기 조선(22) - 조선의 서구 세력에 대한 인식 변화(2-2) 병인양요(1866) 이후로 형성된 반서구적 분위기에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해준 사건이 있었다.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저지른 남연군 묘소 도굴사건이다. 성리학의 사상체계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조상의 유택이 서양 도굴꾼에게 파헤쳐진 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금상의 조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친 파렴치범과 그가 속한 국가를 동일시하여 금수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서구 세력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미국 함대의 일방적인 통상 요구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남연군 묘 도굴사건 이후로 불과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함대가 조선 해역으로 들어와 통상을 강요하는 행위는 앞서 조선이 체험했던 파렴치한 서구 세력과 동일하게 인식되어 조선의 복수심을 자극하기.. 2023. 6. 7.
격동의 19세기 조선(21) - 조선의 서구 세력에 대한 인식 변화(2-1) 조선 조정은 프랑스 함대가 조선해역에서 빠져나간 직후인 1866년 11월 12일 도성 외곽지역에 배치했던 병력들을 복귀시키고, 계엄도 해제했다. 14일에는 강화유수부 복구 사업을 총괄할 심영 영조도감을 설치하기로 하고, 강화도 복구작업에 필요한 각종 물자와 경비·인력 등을 재정 담당 부서와 각 영문에서 전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우선권을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 함대의 불법침입과 조선의 정당방위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홍보작업도 병행해 나갔다. 예컨대 부산의 왜관에 병인양요의 전후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 문서를 비치하여 일본인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근절대책을 강구하면서 외세의 침입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고조시켰다. 동래부와 의주부 등지에는 서양 물품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2023. 6. 1.
격동의 19세기 조선(20) - 강화도 광성보 전투 미국 아시아 함대 상륙부대는 초지진을 점령한 후 강화해협을 따라 북상했고, 포함 모노카시호는 1871년 6월 11일 새벽부터 덕진진에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덕진진의 조선군도 피해를 입고 후방으로 퇴각했다. 아시아 함대 상륙부대는 초지진 후방에서 야영한 후 11일 덕진진을 무혈로 점령하였다. 퇴각했던 조선군 수비대는 덕진진에 진입한 상륙부대에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무렵 광성보 일대에는 진무영 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는 병력 5초가 투입되었으므로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런데 아시아 함대의 해상 지원부대가 11일 정오 이후로 광성보 일대에 함포사격을 개시하고, 상륙부대도 대포 4문으로 조선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자 광성 돈대를 중심으로 주둔한 어재연의 조선..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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