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와 이야기37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5】 출병계획 수정 보완 함경도 북병영 병마우후 변급, 파병군 사령관에 선임 출병부대 사령관에 선임된 병마우후 변급이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군사들이 작전을 종료하고 무사히 개선하는 일이었다. 특히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청을 지원하기 위해 싸우다가 질병을 앓는 등 위급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조치하였는데, 그의 건의에 따라 군사 10〜15명당 사지마(私持馬) 1필씩을 보유하도록 허락하여 유사시에 서로 구제할 수 있도록 했다. 영장과 군관 2명·소통사(小通事) 2명·기수 4명에게도 사지전마(私持戰馬)를 지급해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이역만리 타국에 출병하여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7명에게 복마(卜馬) 1필씩을 배정한 것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추가로 사마(私馬)를 끌고 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 한 의도.. 2024. 3. 13.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4】 출병계획 수립과 부대편성 영의정 정태화가 추천한 함경도 북병영 병마우후(兵馬虞侯) 변급(邊岌)이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한거원이 효종의 질문에 ‘북도의 수령이나 변장이 좋겠다’라고 대답한 대로 북도의 변장이 사령관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어 조정은 군무를 총괄하고 있던 비변사로 하여금 출병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15개 항목의〈함경북도포수영고탑입송절목(咸鏡北道砲手寧古塔入送節目)〉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작성되었다. 1.포수(砲手) 100명은 북도의 사격 우수자 중에서 최고 정예 요원을 엄선하고, 각각 자장목(資裝木, 현역에 나가는 정군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군보〈軍保〉가 부담하는 목면) 15필씩 지급한다. 2.화병(火兵) 20명은 북도 군사 중에서 선발하여 보내며, 각각 자장목 15필씩 지급한다. 3.영장(領將) 1명에게 자장목.. 2024. 3. 6.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3】 청의 출병 요청과 제1차 출병 준비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 청나라 조정은 토벌군을 편성하면서 최신 화약 병기를 제압할 조선군 정예 조총수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긴급히 파견했다. 비변사(備邊司)는 청나라 역관(譯官) 한거원(韓巨源)이 청 세조의 칙서를 가지고 입국하고 있다는 사실을 1654(효종 5년) 1월 28일 국왕 효종에게 보고했다. 압록강 남안의 의주부(義州府) 부윤이 직속 상관인 평안도 관찰사(감사)에게 보고한 상황이다. 한편 한거원을 청에 귀화한 조선인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으나, 《승정원일기》인조 22년(1644) 4월 30일 기록에 친동생 한명철(韓明哲)이 평안도 창주(昌州)에서 80세를 바라보는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했으니 조선인이 분명해 보인다. 한거원이 조선에 입국하는 목적은 당시 평안 감사인 허적(許積)이 사절단을 .. 2024. 2. 28.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2】 청, 새로운 적 러시아와 조우 러시아의 동진정책과 헤이룽 강 탐사 제정러시아는 17세기부터 품질이 우수한 검은 담비·은여우·비버·족제비 등의 모피(毛皮)를 구하기 위해 시베리아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선봉에 카자크(Kazak, Cossack) 집단을 내세웠다. 카자크는 본래 러시아 변경 지대에 살던 기병전사 집단의 호칭이었다. 그 중에는 지주나 관리의 탄압을 피해 변경지대에 숨어 살던 농민이나 범죄를 짓고 도망쳐 온 유랑민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의 수렵과 어로, 그리고 약탈을 생업으로 삼았다. 카자크 집단은 배를 타고 아무르 강(헤이룽 강) 하구를 따라 내려왔다. 이 무렵 아무르 강 하구에서는 역시 배를 타고 내려온 조선 상인들과도 물물교환 형식으로 교역을 했다. 조선과 러시아의 비공식적인 최초의 만남일 것이다. 당시 조선 .. 2024. 2. 21.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 조선과 청의 전쟁-치욕적 패배 조선은 17세기 초반 국왕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으로 명(明)과 후금(後金, 1627년 淸으로 개칭)의 패권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이후로 집권한 세력은 노골적인 배금친명(排金親明)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조선은 명과 함께 200여 년간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은 관계이며,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도원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했다. 명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그를 구속.. 2024. 2. 14. 한국의 성곽 공방전 7-7. 西歐 列强의 침입과 강화도 공방전(1866·1871) 유럽제국이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하고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리자 노대국 청나라도 열강의 상품 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전락했다. 뒤이어 일본도 개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동양 삼국 중에서 오직 조선만이 쇄국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으로 ‘양요(洋擾)’가 발생하게 되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와 한강 수로의 입구를 봉쇄하면서 야기된 무력 충돌사건이다. 이해 정월,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되자, 리델은 텐진(天津)으로 탈출하여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극동함대가 1866년 9월 정찰을 마치고, 10월 군함 7척으로 재침하였다. .. 2024. 1. 10.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