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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곽 공방전에 관해서 2020년 5월부터 6월 30일까지 history-talk.tistory.com에 연재했었다. 그러나 ‘조선전기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2)’를 끝으로 블로그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회를 올리지 못한 채 많은 시일이 지체되었다. 뒤 늦게 새 블로그 historyof.tistory.com에 마지막 회를 올려서 마무리 지어려고 한다. 애독자의 많은 양해를 바란다. |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을 통해 화약병기인 조총(鳥銃)의 위력을 체험했다. 이를 계기로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명나라 남병(南兵)의 단병전술(短兵戰術)을 도입하여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후에 여진족의 남침을 당해서는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북침에 대비한 전술 개발이 북방 여진족의 남침에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여진족의 청국(淸國)에 항복하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 치욕을 겪었다.
그 후로 조선은 청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무기를 제조하거나 산성을 축조하는 등의 군사력 증강 작업은 아예 추진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청국의 군사적 요청에 시달렸다. 예컨대, 1657년(효종 8) 청국이 조선에 조총 1백 정을 요구한 것도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조선은 중앙군이 보유한 조총 중에서 엄격한 선별 과정을 거친 최상품 1백 정을 그들이 지정한 봉황성(鳳凰城:요녕성 봉성시)까지 운반해 주었다. 그 밖에 1654년과 1658년 청군의 요청에 따라 나선(羅禪, 러시아) 정벌전에 조선군 정예 조총수가 참전하게 되어 조선에 큰 부담이 되었던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청국의 감시 속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서양 열강의 세력이 밀려오면서 19세기 이후로 조선에 대한 감시도 유명무실해졌다. 1863년 고종 즉위로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서양의 신식무기와 근대적 군제를 도입하는데 관심이 높았으나, 정치·군사적으로 대응 역량을 갖추기도 전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전근대적 군사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발발한 정족산성 공방전은 개인화기에 의한 총격전으로 전개되었다. 전혀 새로운 양상의 성곽 공방전에서 조선군은 재래식 화승총(火繩銃)의 열세를 산성의 이점으로 극복함으로써 근대화된 프랑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전략적 거점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여 승리함으로써 적군의 전면 철수를 압박한 19세기 후반의 대표적 공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과 수년 후인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으로 전개된 돈대 공방전의 양상은 크게 달랐다. 조선군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양상의 공방전이었다. 미군이 함포사격과 동시에 상륙부대의 지상공격을 연계하는 이원화된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함포의 원거리 포격으로 돈대가 파괴되고 타격을 입은 조선군이 후방지역으로 퇴각했기 때문에 갯벌 지역으로 상륙하는 미군의 취약점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돈대 앞바다에 펼쳐진 넓은 갯벌을 통과하는 동안에 미군은 비무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저항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돈대와 그 주변 갯벌 지역의 이점을 수성작전에 이용하지 못함으로써 수도 한성의 인후부인 강화도 일대가 미국 함대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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