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와 이야기37 한국의 성곽 공방전 7-6. 淸軍의 남침과 남한산성 공방전(1636∼1637) 조선은 16세기 말 해양세력 일본의 침공을 받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로부터 30여 년도 채 지나지 않은 17세기 초반에 대륙세력 여진족(女眞族)의 대대적 침공을 받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불리는 첫 번째 침공은 1627년으로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부르던 시기며, 1636년의 두 번째 침공인 병자호란(丙子胡亂)은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직후다. 이 병자호란 때 조선 국왕 인조(仁祖)와 조정 중신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성하여 최후의 수성전을 전개한 것이다. 후금은 1616년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국가다. 앞서 명은 후금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벌전쟁을 단행하였고,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해 왔다. 당시 국왕 광해군(光海君).. 2024. 1. 8. 한국의 성곽 공방전 7-5. 日本軍의 西進과 진주성 공방전(1592∼1593)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이후 일본군의 왕성하던 기세도 9월경부터는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해성(金海城)에 집결한 일본군 2만여 명은 전라도 진입을 최종목표로 하면서 경상 우도의 요지인 진주성(晉州城)을 중간 점령목표로 삼았다. 일본군이 9월 하순부터 작전을 개시하자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지휘하는 2천여 명이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창원성과 함안성을 차례로 빼앗기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1천 5백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퇴각하였으나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유숭인 군의 입성을 거부함에 따라 진주성 동문쪽 외곽지역에서 일본군과 10월 초에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유숭인의 조선군은 진주성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분전하다가 유숭인을 비롯한 지휘부와 대다수 장병.. 2024. 1. 6. 한국의 성곽 공방전 7-4. 日本軍의 북상과 평양성 공방전(1592∼1593) 일본은 최고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82년에 죽은 후로 10여 년 동안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인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자신의 주군을 죽인 반군세력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는 1585년 9월부터 조선을 거쳐 중국대륙의 명(明)나라로 쳐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기어이 1592년 4월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임진왜란(壬辰倭亂, 일명 조일전쟁)’을 일으켰다. 조선군은 일본군 제1군과 최초 전투에서 실패하여 부산진성(釜山鎭城)과 동래부성(東萊府城)을 차례로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양산성과 밀양성이 무혈로 점령당하는 등 낙동강 이동의 경상좌도(慶尙左道)를 불과 수일 만에 일본군 수중에 넘겨주고 말.. 2024. 1. 4. 한국의 성곽 공방전 7-3. 元軍의 남침과 귀주성 공방전(1231∼1232) 10세기 초에 중국대륙 한족(漢族)의 강력한 통일제국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북방민족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대륙의 북방 초원지대에서 유목·수렵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거란·여진·몽골 등의 민족들이 강력한 신흥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농경민족인 송(宋)나라를 압박하면서 중국대륙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무렵 중국대륙에는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밀리면서 시작된 이른바 남송(南宋∶1127∼1279) 시대와 거란족의 요(遼)나라가 금나라에 멸망한 시기가 80여 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이같이 강성하던 금나라가 13세기에 접어들자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즉 내부 혼란이 심화하는 가운데 그들의 영향권에 있던 거란 유족(契丹遺族)이 이탈.. 2024. 1. 2. 한국의 성곽 공방전 7-2. 遼軍의 남침과 흥화진성 공방전(1010·1011) 중국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생활권으로 하기 때문에 북방민족(北方民族) 중 하나로 불리는 거란족(契丹族)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은 당(唐)나라가 말기적 혼란상을 노출시키는 틈을 타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당의 강력하던 이민족 통치 정책이 약화된 상황이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거란족 지도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10세기 초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五代)의 혼란기를 맞이하자 중원의 지배자를 꿈꾸며 요(遼)나라를 건국하고(916), 주변 세력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渤海)도 926년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한동안 거란족 내부의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면서 대외팽창 정책이 탄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국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안정을 유지하기 시작한 것.. 2023. 12. 31. 한국의 성곽 공방전 7-1. 唐軍의 침입과 안시성 공방전(645) 고구려는 5세기 초 광개토왕(廣開土王:391∼412)대에 이르러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반도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6세기 초반까지도 군사적 우위를 지속하면서 고구려는 여전히 동북아의 강국이었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413∼491)시대에 이르러서는 우리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대륙은 이른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이 남북조 시대를 맞이한 가운데 동북아의 고구려는 서북 국경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리적으로 근접한 북조의 북위(北魏)와 선린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면 북위와의 관계를 먼저 개선해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군소 세력 집단간 정쟁으로 인해 집권층.. 2023. 12. 29.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