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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사옥 이후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면서 조선 조정의 대외정책은 강경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따라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는 재야 유림세력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급기야는 조정의 또 다른 강경세력과 제휴함으로써 자신들의 강화된 발언권으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해나갔다.
1873년 윤 6월 성균관 유생 이세우 등이 흥성대원군에게 ‘대노(大老)’의 존호를 올리자고 상소했다. 그러나 11월 이항로의 제자인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로 맞불을 질렀다. 재야 유림세력은 앞서 1865년(고종 2) 철폐된 ‘만동묘’를 복원하도록 주장하여 조정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1874년 7월 만동묘를 중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1592) 때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 신종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는 사당으로 건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패한 재야 유림의 온상이라는 이유로 10여 년 전에 철폐되었었다. 즉 고종과 민비로 대표되는 조정의 새로운 강경세력이 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입지를 강화한 재야 유림세력과 손잡고 실권자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정치적 변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1873년 11월 고종은 이른바 '친정'을 선포하고, 명실상부한 조선 국왕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고종은 1875년 5월부터 경복궁에서 국정을 총괄하였고, 권력을 넘겨 준 흥선대원군은 6월 운현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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