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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서구 열강의 침략세력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자구적 논리가 ‘위정척사’였다. 그 행동 방략이 ‘척양’과 ‘척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페르트가 1880년 저술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에서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절박한 위기에서 쉽사리 벗어나게 되자 자신들도 놀랄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 말이 당시 조선 지도층의 인식을 잘 대변해 준다. 이는 곧 자부심으로 연결되었고, 서구 세력에 대한 강경정책으로 나타났다.
조선은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을 복고한 후 국교 재개를 요청했을 때 국서에 찍힌 도장의 형식이 이전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해 버렸다. 1870년 6월 초 독일 군함 헤르타(Hertha)호가 부산항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을 때 이들을 안내한 수로 안내인들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아예 ‘왜노’와 ‘양이’를 동일시하는 ‘척왜척양론’으로 확산되었다. 즉 서양 침략세력과 일본을 모두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조선 조야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로 위정척사 사상을 한층 강화해 나갔다. 그런데 1872년 4월에는 앞서 청국이 1870년 7월에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조선 내정과 외교 문제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언약을 받아 낸 사실을 확인한 조선 조야에서는 대외 강경론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1873년 8월 북경에 나타난 일본인들이 서양인 복장을 하고, 일본 왕이 유교경전을 버리고 사교(천주교)를 믿으며 그의 복장도 역시 서양인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조선 조야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는 조선이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는데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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