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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은 어떤 나라인가?
청나라 조정은 토벌군을 편성하면서 최신 화약 병기를 제압할 조선군 정예 조총수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긴급히 파견했다. 비변사(備邊司)는 청나라 역관(譯官) 한거원(韓巨源)이 청 세조의 칙서를 가지고 입국하고 있다는 사실을 1654(효종 5년) 1월 28일 국왕 효종에게 보고했다. 압록강 남안의 의주부(義州府) 부윤이 직속 상관인 평안도 관찰사(감사)에게 보고한 상황이다.
한편 한거원을 청에 귀화한 조선인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으나, 《승정원일기》인조 22년(1644) 4월 30일 기록에 친동생 한명철(韓明哲)이 평안도 창주(昌州)에서 80세를 바라보는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했으니 조선인이 분명해 보인다. 한거원이 조선에 입국하는 목적은 당시 평안 감사인 허적(許積)이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실정이었다.
부정기적으로 입국하는 중국 사신이 무슨 임무를 띠고 있는지 사전에 파악하여 긴급히 보고하는 것은 평안 감사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전무했다. 평상시 칙사(勅使)의 행차와 다를 뿐 아니라 도중에 위로연회를 생략할 정도로 한양 길을 재촉하고 수행원도 매우 적다는 점이 조선의 궁금증을 키웠다.
1654년(효종 5) 2월 2일 효종이 한거원을 접견했다. 그리고 대신들이 배석한 가운데 편전에서 청나라 예부의 자문이 공개되었다. 이 자리에서 한거원이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조선에서 조총(鳥銃)을 잘 쏘는 정예 군사 100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암반장진(昻邦章京)의 지휘를 받아 나선(羅禪)을 정벌하는데, 3월 초10일까지 영고탑(닝구타)에 도착하도록 해주십시오."
청나라 예부로부터 출병 요청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은 효종은 자문을 정독해 본 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배석한 가운데 한거원과 다음과 같이 대담했다.
효 종:나선은 어떤 나라인가?
한거원:영고탑 가까이에 다른 족속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나선입니다.
정태화(영의정):영장(領將)은 어떤 관원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소?
한거원:북도의 변장이나 수령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
이 자문의 요지는 청의 암반장진 사르후다가 지휘하는 나선 정벌작전에 조선군 정예 조총수 100명을 파견하되, 회령부를 거쳐 3월 10일까지 오늘날 헤이룽장 성 무단장(牡丹江) 시 닝안(寧安) 현 부근인 닝구타(寧古塔)에 집결하여 그의 지시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닝구타의 ‘닝구’는 여진어로 ‘여섯’이라는 뜻이며, ‘타’는 ‘다’음이 변형된 것인데 ‘어른’ 또는 ‘존장’을 의미한다. 누르하치의 ‘여섯 선조들이 살았던 신성한 고장’이라는 뜻으로, 그 지역의 중심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군 사령관에 선임된 사르후다는 출병 부대가 통과하는 레파(列伐)지방 출신인데, 그의 선조는 건주위 출신이라고 한다. 사르후다는 누르하치가 건주위로 이동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초기부터 동북 변경 지역에서 전공을 세워 신임이 두터웠다. 병자호란 때 38세로 부원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던 인물로 조선에서는 ‘사아호대(沙兒虎大)’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청이 정벌작전을 전개하려는 ‘나선’이 ‘러시아’를 한역(漢譯)한 것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그 밖에도 나찰(羅刹)·나차(羅車)·나사(羅沙)·나차(羅叉)·나산(羅先)·노찰(老察)·노차(虜車) 등으로 《청실록(淸實錄)》에 기록되고 있다.
이 무렵 조선에서도 서양 세계를 인식하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정묘호란이 발발한 1627년(인조 5)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다른 동료 2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는 박연(朴淵, 朴燕, 朴延)이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개명하여 홍이포(紅夷砲)를 제작하고 운용하는 등의 선진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벨테브레이는 생존했으나 동료 2명은 전사했다. 조선인으로 귀화한 박연은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 그가 조선인으로 정착하여 사는 동안 조선 조정은 더이상 서양을 이해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박연이 입국한 이후로 4반세기가 지난 1653년 7월 네덜란드인 하멜(H.Hamel) 일행이 조선에 들어왔다.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을 박연이 한양으로 데리고 와서 효종에게 소개했다. 이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청으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은 것이다. 한거원에게 ‘나선’에 대해 질문한 것도 이 같은 궁금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과 러시아의 비공식 접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중세기 러시아는 240여 년 동안 몽골족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후 시베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 상인들과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 상인들은 아무르 강(헤이룽 강) 상류와 합류하는 실카(Schilka) 강의 연안 도시인 네르친스크에서 러시아 상인들과 교역하고 돌아왔다. 담배나 명주 등을 가지고 가서 러시아 모피와 교환해 왔는데, 공식 교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실태를 파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르 강변의 네르친스크는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진출하는 전진기지로 개발되었고, 1654년에 요새화되었다. 청과 러시아의 수차례 무력충돌이 있은 후 1689년 국경획정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 스타노보이(Stanovoi) 산맥을 따라 국경선이 설정되었다. 이 조약은 청이 유럽 국가와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며 또한 불평등조약이 아니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처럼 ‘나선’에 대해 비교적 대외 정세에 밝았을 것으로 보이는 대통관 한거원도 모르기는 효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효종의 질문에 시원스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영고탑(닝구타) 인근에 있는 다른 족속’이라는 정도로 얼버무리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군의 작전 계획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실제로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조선군이 소속되어 함께 전투를 벌일 청군의 출병에 대해 궁금했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어떤 인물로 지휘관을 선임해야 좋을지 한거원에게 물었다. 혹 그의 대답 속에 어떤 단서라도 들어 있을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거원의 대답은 여전했다. 그저 ‘북도의 변장이나 수령 중에서 차출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도로 가볍게 조언했을 뿐이다.
효종은 청의 지원 요청에 가부를 선택할 여건이 못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637년 1월 청과 강제로 체결한 정축화약(丁丑和約)에 따르면 청군이 명군과 싸울 때 청군을 지원하는 군사력을 파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단 이번에는 명분상 ‘나선 오랑캐’를 토벌하는 청군의 작전에 참전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명군과 싸우기 위해 출병할 때보다는 효종의 마음이 한결 덜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전 준비도 신속히 추진되었다.(《조선의 대외정벌》344~349쪽, 알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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