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7세기 초반 국왕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으로 명(明)과 후금(後金, 1627년 淸으로 개칭)의 패권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이후로 집권한 세력은 노골적인 배금친명(排金親明)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조선은 명과 함께 200여 년간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은 관계이며,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도원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했다. 명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그를 구속하여 옥에 가두듯이 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병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오랑캐나 금수의 나라로 전락하게 했으니, 그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다.’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7세기 전반에는 대대적인 무력침공을 받게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인조와 그를 추대한 정치 집단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을 전면 폐기하고 오로지 친명(親明)으로 외교 정책의 기조를 확고히 천명했다.
1623년 5월에 새 정권은 모문룡(毛文龍)이 지휘하는 명군이 주둔한 평안북도 철산 앞 바다의 가도(椵島)에 접반사(接伴使)를 파견하여 후금군과 싸울 수 있도록 각종 군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친명 정책을 가시화했다.
그리고 뱃길로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새 국왕 인조의 정통성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광해군 때에 소원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전통적인 조·명 관계의 회복을 천명했다. 이 같은 명에 대한 사대적(事大的) 자세와는 달리 후금에 대해서는 서북 변경 지역의 요지인 의주·용천·삭주·안주 등지에 하삼도와 훈련도감에서 선발한 정예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적대적 자세를 취했다.
조선의 후금에 대한 적대의식의 공공연한 표출은 후금을 자극하여 강경 세력들에게 조선을 침공할 명분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李适)이 휘하의 군사 1만여 명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일부가 후금으로 망명하여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새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을 폭로하자 양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조선은 후금과 단교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627년(인조 5) 1월에 후금군의 대규모 침공을 받은 것이다.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인 훙타이지(皇太極)는 정예 기병 3만여 명을 직접 지휘하여 압록강 하류의 의주(義州:신의주 북동쪽 20킬로미터)를 통과한 후 수도 한성을 향해 남진했다. 수일 만에 한양 북방 200여 리 지점인 평산(平山)에 이르러 조선에 화평 교섭을 제의했다.
후금은 명군과 전쟁에 주력하는 상황에서 조선과 조속히 화친을 맺으려 했고, 조선도 미처 대응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한양 근교까지 쳐들어 온 후금 기병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화의가 필요했다. 양측의 이해가 일치하자 후금을 ‘형(兄)’으로 하고 조선을 ‘아우(弟)’로 하는 이른바 ‘정묘화약(丁卯和約)’이 체결되었고, 후금군은 그해 3월 스스로 물러갔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외교 노선을 선회한 대가는 한층 가혹한 시련을 강요했다. 이미 중원의 패자나 다름없는 위상과 군사력을 확보한 훙타이지는 1636년(인조 14) 4월에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황제(皇帝)’로 자립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 대해서는 정묘화약의 요지인 ‘형제지맹(兄弟之盟)’을 주종관계의 개념인 ‘군신지맹(君臣之盟)’으로 개정하여 청국을 황제국으로 예우하는 새로운 관계 정립을 강요했다.
이 같은 청의 강압적인 요구는 조선의 반청의식을 자극하여 척화 강경론자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 조야는 이들의 척화론(斥和論)과 주화론(主和論)으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외교적 절충으로 일단 청의 침공을 방지하고 국력을 양성하여 차후에 복수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에 근거한 주화파의 실리 외교론은 척화파의 감정적 명분론에 밀려나고 말았다. 척화론은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고 인조는 교서를 통해 청과 일전을 불사한다는 전쟁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청 태종 훙타이지는 조선의 결연한 반청 의지를 확인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2차 무력 침공을 단행했다. 1636년(인조 14) 12월 1일 수도 심양(瀋陽:랴오닝 성 선양 시)에 집결하여 지휘 부서를 편성하고 12만 8,000명을 투입했다. 청병(淸兵) 7만 8,000명·한병(漢兵) 2만 명·몽골병 3만 명으로 편성한 다민족군이었다.
심양을 출발한 청 태종은 이번에도 불과 수일 만에 도성 근교에 이르러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인조와 세자는 강화도에 이르는 통로가 차단되자 부득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청군은 정묘호란 때 강화도 진입로를 차단하지 못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 지도층은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분리된 채 개별적으로 항전하다가 결국 강화도가 먼저 함락되어 왕실 가족들이 포로가 되자 항복했다.
강화도가 쉽사리 함락된 것은 여진족이 수전(水戰)이나 해전(海戰)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추상적 고정관념에 따라 안일하게 대처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의도를 간파하고 수전에도 익숙한 명나라 한족 군사들을 앞세워 강화도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결국 주화론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637년(인조 15) 1월 청국의 요구대로 ‘군신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체결했다. 전례가 없었던 불평등조약인 정축화약에 조선은 손발이 묶이고 말았다.
조선은 불과 수년 전에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명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했으나 정축화약을 체결한 이후로는 오히려 명을 공격하는 청의 군사동맹국으로 위상이 반전하는 상황에 처했다. 명을 공격하는 데 군사를 파견하여 지원하라는 청의 요청을 받고 조선이 겪은 고통은 매우 컸다. 1592년 임진왜란의 위기 상황에서 명나라 육군과 수군의 지원을 받았던 조선은 국체를 보전할 수 있도록 해준 지극한 은혜를 입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을 저버리고 청군을 지원하여 명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축화약 11개 항복 조건 중에서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보병·기병·수군을 징발하면, 수만 명을 기한 내에 집결시켜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조항 때문에 군사를 파견하여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청은 조선에서 철군한 그해(1637) 9월 명나라 금주(錦州∶랴오닝 성 진저우 시)를 공격하면서 10월 초순까지 조선군 5,000명을 지원하도록 요구해왔다. 이 문제로 조선 조정에서는 찬반양론이 분분했으나 청국과 강화를 주선했던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이 파병 반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최명길이 앞장서서 청국과 담판하여 출병하지 않기로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이듬해(1638) 3월 조선은 다시 청국의 요청을 받고 조총수와 궁수로 편성된 5,000명이 3월 20일 출정했다. 이들은 4월 5일 통원보(通遠堡∶랴오닝 성 단둥 시)에서 청군과 합류했으나, 고의로 기일을 지연시켰다고 청국이 트집을 잡아 회군시킴에 따라 도중에 복귀하고 말았다. 이듬해(1639) 10월에도 지원 요청에 따라 평안 병사 임경업(林慶業)이 군사 6,000명과 전선 120척을 이끌고 12월 10일 의주를 출발하여 이듬해 1월 청군이 금주를 공격할 때 참전했다. 임경업 또한 명군에 정보를 제공하고 작전을 회피했다는 등의 혐의로 청군이 회군시키자 되돌아왔다.
그 후 1641년 3월, 청국의 지원 요청에 따라 또다시 2,000여 명이 참전했으나 역시 소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는 등 협조하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참전한 조선군 장수가 청군의 눈을 속이며 비협조적으로 작전을 벌이다가 청군 지휘부에 발각되어 참수형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은 청이 조선군의 지원을 받아 대명 침공 작전을 전개하려던 계획을 무산시켰다. 청군은 조선군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적개심만 고조시키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
한편 청 태종을 이어 세조(世祖)가 즉위하고, 조선에서도 인조를 계승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한 17세기 중반 이후로도 조선의 대청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1649년 즉위한 효종은 1637년부터 1644년까지 8년간 청국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강렬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 청에서의 인질 생활을 일일이 기록하여 조선 조정에 보고한 이른바 《심양장계(瀋陽狀啓)》와 수행 관원들이 기록한 일지인 《심양일기(瀋陽日記)》를 중요한 자료로 남겼다.
심양에서 고달픈 인질 생활을 함께했던 형님 소현세자가 병으로 일찍 죽자 왕위에 오른 효종이 강렬한 적개심으로 청국에 보복전을 전개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며 암암리에 군사력을 증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28년 제주도에 표착하여 조선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朴燕, 朴淵, 朴延, 얀 야느스 벨테브레이 Jan Jansz Weltevree)을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화포를 제작하도록 조치한 것도 효종이 군사력 증강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 한 사례다.
조선은 1644년 9월 청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명이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상황에서도 명나라가 재기하기를 기대하며 청국에 설욕하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효종은 17세기 후반부터 북벌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무기를 확충하고 군사 요충지에 성곽을 수축하는 등의 방위력 증강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이 사실이 누설되어 청의 위협과 정치적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어영청 군사 2,000명과 훈련도감 군사 1만 명을 확보하는 목표를 세우고 정예 중앙군을 양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의 청에 대한 예속은 명나라의 몰락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청의 중원 지배가 공고해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처지에서 청이 ‘나선(羅禪)정벌’ 참전을 요구해 왔다. 연합작전의 대상이 명나라가 아니라 ‘나선(러시아)’이라는 전혀 생소한 국가였기 때문에 이전과 상황이 크게 달랐다.
조선은 청이 요청한 기일을 지연하거나 작전을 기피하는 등의 행동으로 청군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인 정벌’에 참전하는 소수의 조선군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주력군인 청군 사령관의 철저한 지휘 통제를 받으며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조선의 대외정벌》320~335쪽, 알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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