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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5】 출병계획 수정 보완

by 히스토리오브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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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북병영 병마우후 변급, 파병군 사령관에 선임

출병부대 사령관에 선임된 병마우후 변급이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군사들이 작전을 종료하고 무사히 개선하는 일이었다. 특히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청을 지원하기 위해 싸우다가 질병을 앓는 등 위급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조치하였는데, 그의 건의에 따라 군사 10〜15명당 사지마(私持馬) 1필씩을 보유하도록 허락하여 유사시에 서로 구제할 수 있도록 했다. 영장과 군관 2명·소통사(小通事) 2명·기수 4명에게도 사지전마(私持戰馬)를 지급해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복원된 경상우병영의 병마우후 집무 공간(진주시 공식 블로그)

 

이역만리 타국에 출병하여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7명에게 복마(卜馬) 1필씩을 배정한 것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추가로 사마(私馬)를 끌고 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 한 의도였다. 반면 청군 사정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로 인해 혹시 양국간에 마찰이 발생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결국 영장과 군관, 통사의 전마 외에는 사마를 끌고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이 같은 결정을 한 이면에는 사마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그 외 각종 준비 작업이 순조롭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2월 2일 비변사 건의에 따라 경기·강원·함경도의 모든 참(站)에 각각 파발마 2필씩을 배치하고, 강원도는 연도변의 각 참이 곧 역에 해당하므로 역마(驛馬)를 배치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북쪽의 상황이 긴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발마를 대기시키면 그에 따른 폐단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결국 종전처럼 군사가 일정 구간을 걸어서 전달하는 ‘보발(步撥)’로 통신 연락을 유지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중국 고대 파발마 회화(부분, 네이버 블로그 초이스)

한편 조선군 출병을 요청한 한거원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이에 앞서 한거원은 정명수(鄭命守)가 이인웅(李仁雄)과 절친한 관계라고 주장하면서, 죄인으로 투옥된 이인웅을 사면해주도록 요청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효종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견해를 물었다. 정태화는 이인웅이 정명수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하지만 그의 죄가 크지 않으니 한거원의 부탁대로 사면해주면 한거원의 체면을 살리고 생색도 날 것이라고 건의했다. 효종이 분간해서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정명수의 신분은 본래 평안도 은산(殷山)의 노비였다.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官奴婢)인지 개인에게 소속된 사유재산과 같은 사노비(私奴婢) 출신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젊은 나이에 포로가 되었다가 후금에 귀화한 인물이다. 조선 국내 정세를 청국에 고자질한 공로로 청 태종에게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노비 출신이 어떤 고급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청에서 조선의 천민 신분을 세탁하여 출세한 특이한 인물 중에 하나다.

병자호란 이듬해 롱구다이(龍骨大)와 마푸다이(馬夫大)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입국한 정명수는 조선의 고관대작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해 있었다. 오히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선의 운명을 맡겨야 할 형편으로 상황이 뒤바뀌었다. 결국 조선은 화의를 서둘러 주선해달라며 급행료로 은 1,000냥을 그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물론 롱구다이와 마푸다이에게도 뇌물 3,000냥이 전달되었다.

MBC금토드라마 '연인' 용골대(배우 최영우 분장)

이후로도 정명수는 청나라 사신을 따라 수차례 조선을 드나들었다. 그는 조선 변경에 입국하여 한양에 이르는 주요 고을을 지날 때마다 기생들에게 수청을 들도록 요구했다. 급기야 그의 만행에 견딜 수 없었던 기생들의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통역관 중에서도 악명을 날렸던 인물이다.

이런대도 정명수는 어떤 처벌을 받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조정 중신들이 정명수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해 그의 처남마저 덩달아 출세 길이 열렸다. 사전에 정명수가 압력을 행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신들이 처남 봉영운(奉永雲)에게도 벼슬을 주자고 인조에게 건의하는 한심한 작태도 벌어졌다. 결국 인조도 이를 승낙하고 말았다.

봉영운은 그의 누이가 심양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정명수의 아내가 되는 바람에 관운이 열렸다. 봉영운 역시 평안도 정주(定州)의 관노비로 있던 인물이다. 그런데 봉영운은 벼슬자리를 사양했다. 자신이 미천한 노비 신분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상중에 있는데, 정명수의 처족(妻族)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공로도 없이 관직을 맡아 어머니 상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짐짓 예의를 차리는 듯이 사양하던 봉영운은 정명수의 끈질긴 권유로 1642년(인조 20) 평안도 순천(順川) 군수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적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며 갖은 악행을 일삼던 정명수였지만 부귀영화를 오래 누리지는 못하고 결국 청에서 제거당하고 말았다.

1643년 대통관 한거원도 의주부(義州府) 소속의 관노비를 양민 신분으로 상승시켜 주라고 조선 조정에 압력을 행사했다. 이때 한거원이 신분상을 요구한 관노비가 누구인지, 또 한거원과는 어떤 관계인지, 어떤 벼슬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한거원의 과거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자신의 친인척에게 벼슬을 주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는 출신 내력에 관계없이 통역관들의 공통된 작태였다.

역관 주요 통과 지역, 의주-정주-평양(구글지도)

효종은 한거원이 출국을 앞두고 하직 인사를 드리기 위해 대궐에 들어오자 출병 준비 상황을 설명하고, 한거원의 지속적 관심을 부탁하면서 은근히 청국의 내부 정세에 대해 질문했다.

 

효 종:황제의 연세가 몇이신가?

한거원:17세 이십니다.

효 종:북경의 군사들은 아직도 정예군인가?

한거원:예전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오직 학문을 숭상하기 때문에 훈련만 하지는 않습니다.

효 종:황제께서는 주로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한거원:항상 태액지(太液池)에서 노시는데, 겨울에는 얼음 지치기를 하시고, 여름에는 물에서 뱃놀이하시며, 또 나무 인형을 만들어 장난하시기도 합니다.

 

효종과 대담을 마친 한거원에게 관례대로 접반관(接伴官)을 파견하여 호송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호의를 거절하면서 조선말을 알아듣는 자신만 왔기 때문에 차비역관(差備譯官)도 파견할 필요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차비역관 현덕우(玄德宇)를 통해 조선측의 답신을 가지고 6일 출국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출병부대의 병력 규모와 현황을 자세히 기록하기로 한 조선 측 방침에 동의하면서, 출병 지휘관 선임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타냈다. 이때 비로소 북병영 병마우후 변급의 인적사항이 청측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청나라 대통관 한거원은 조선에 파견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갔다.

그후로 조선군 출병 준비는 신속하게 추진되어 완료되는 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대통관 한거원이 조선 측의 만류에도 서둘러 출국한 것과는 달리 조선군 출발 예정일인 3월 10일이 지나도록 청의 통지문이 도착하지 않았다. 출병부대가 준비를 완료한 상황에서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록 통역관이 도착하지 않자 출발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변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즉시 출병하려고 한다’는 의사를 청에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방에서 선발한 포수와 함께 동원되는 마필(馬匹)이 재자관(賫咨官, 중국 조정 6부에 공문을 전달하는 연락관)이 돌아올 때까지 한곳에 모여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종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조선이 먼저 출병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군사와 부마(夫馬)가 집결했으나 이미 출발 기한이 지났고, 통역이 언제 도착할지도 알 수 없는 막연한 상황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결국 출병을 기다리는 동안 회령(會寧)에서만 단독으로 군량과 말먹이를 조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병마절도사 정익(鄭榏)의 지시에 따라 출정군 병력을 이웃 고을로 분산하여 대기시키고, 이러한 실정을 문서로 작성하여 청에 알렸다. 그 직후에 청나라 측 연락관이 도착했고, 3월 26일 비로소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진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회령 오국성 성벽(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1910년대)

회령은 1638년(인조 16) 이래로 여진족과의 공식 무역인 ‘회령개시(會寧開市)’가 열리던 곳이기도 했다. 4월과 5월, 10월과 11월 또는 12월에 열리는 회령개시는 1645년(인조 23)부터 격년으로 열린 경원개시(慶源開市)와 함께 북관개시(北關開市) 혹은 북도개시(北道開市)로 불리며, 청나라 상인들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조선의 대외정벌》356~361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경원성과 성문 외곽(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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