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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한국의 성곽 공방전 7-5. 日本軍의 西進과 진주성 공방전(1592∼1593)

by 히스토리오브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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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이후 일본군의 왕성하던 기세도 9월경부터는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해성(金海城)에 집결한 일본군 2만여 명은 전라도 진입을 최종목표로 하면서 경상 우도의 요지인 진주성(晉州城)을 중간 점령목표로 삼았다.

일본군이 9월 하순부터 작전을 개시하자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지휘하는 2천여 명이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창원성과 함안성을 차례로 빼앗기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진주성 전도와 남강
진주성 동장대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1천 5백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퇴각하였으나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유숭인 군의 입성을 거부함에 따라 진주성 동문쪽 외곽지역에서 일본군과 10월 초에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유숭인의 조선군은 진주성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분전하다가 유숭인을 비롯한 지휘부와 대다수 장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기세를 올린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함에 따라 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군민이 총력전으로 1차 공방전을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진주성 제1차 전투 기록화(전쟁기념관)

진주성 공방전은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두 차례 전개되었다. 1차 공방전에서 진주성 수성 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2차 공방전에서는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어 초토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같이 승패가 극명하게 엇갈리게 된 진주성 공방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른바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은 조선의 임진왜란 3대첩 중에 하나며, 대표적 성곽 공방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진주시 진주성 내)

1592년 10월 6일 남강(南江)을 도하한 일본군은 진주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2만여 명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 공포심을 조장하는 심리전으로 공성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진주성 외곽 주둔지 주변에서 자재를 수집하여 주로 동문쪽에서 각종 공성 장비를 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야간에는 불을 피우고 뿔피리 소리와 함성, 조총 발사 등의 방법으로 진주성 수성 부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진주성 제1차 전투 상황(1592.10)

일본군의 공성 장비는 주로 대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제작하였는데, 특히 진주성 성벽과 같은 높이로 축조한 토산(土山)이 주목된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발과 판자를 이용하여 가마니에 흙을 넣어 쌓아 올렸다. 단기간에 진주성 성벽과 같은 높이로 축조했으나 실제 작전에서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진주성과 남강 건너편에 조성된 대나무 숲

그 밖에도 그들의 최신 무기인 조총(鳥銃)의 위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바퀴 달린 고층 누각을 제작하는 등 여러 가지 공성 장비를 현장에서 신속히 제작하여 투입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진주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수성 부대 지휘부의 철저한 사격 통제와 화공작전 등 효과적인 방어준비로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같은 화약 무기를 성벽에 거치하여 발사하고, 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멩이·가마솥의 끓는 물 등으로 공성전을 무력화시켰다.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발굴현장

10월 10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가 동틀 무렵에 막을 내렸다. 오전 11시 무렵까지 일본군이 스스로 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면서 공방전이 종료되었다. 진주목사를 중심으로 한 지휘부와 군민들이 철저한 수성 작전을 준비한 결과로 거둔 총력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된 비격진천뢰, 중완구, 현자총통(국립진주박물관)

그러나 불과 수개월 후에 전개된 일본군과의 제2차 진주성 공방전의 양상은 1차전의 경우와 확연히 달랐다. 1593년 6월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은 앞서 1592년 10월의 진주성 공방전 참패를 설욕하고, 호남지역으로 쳐들어갈 전략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총공세라고 할 수 있다.

복원된 진주성 성벽

1593년 4월 18일 한성에서 남하한 일본군이 경상도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에 도착한 것은 4월 말경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군의 포로로 억류당하고 있었다. 즉 일본군이 한성에서 남하할 때 왕자들을 석방하겠다는 명군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일본군이 안전하게 남하하기 위해 명군 지휘부를 속인 기만전술이었다.

그동안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로 평양성에서 두문불출하였다. 명의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일본군의 기만전술에 속은 사실을 간파하고 사령관 이여송에게 추격을 지시하자 비로소 5월 초 명군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투 현장에 인접한 벽제관
벽제관지 초석 (고양시 벽제동)

명군이 남진하자 일본군도 5월 10일부터 15일까지 밀양 이남 지역으로 이동하여 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하삼도(충청·전라·경상) 일대의 각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일본군이 해상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할 것을 지시했다. 이 무렵 일본군은 한성 철수 이후, 경상도 해안지역 일대에 축조한 여러 왜성(倭城)에 분산하여 장기 주둔태세에 들어갔다.

서생포 왜성의 기단부(울주군 서생면)
기단부 위에 축조된 일본성(왜성)의 일반적 형태(가나가와 현 오다와라성)

당시 진주성의 조선군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를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추대하고, 충청병사 황진(黃進)을 순성장(巡城將)으로 삼아 수성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성 내의 군사는 3천 5백여 명이며, 나머지 6만여 명은 일반 주민이었다.

이때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전라순찰사 권율(權慄) 등의 부대가 인근 의령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동정을 주시하면서 접근하지 못하고, 명군도 거창·남원 등지에 주둔하면서 진주성의 위기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진주성과 진주시 남강의 현재 모습

일본군의 공성전은 6월 20일부터 10일 동안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앞서 1차 공성전 때와 마찬가지로 진주성 외곽에 토산(土山)을 축조하여 공격에 이용하였다. 조선군도 역시 645년 고구려 안시성이 당군에 저항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진주성 안에서 더 높은 토산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현자총통(玄字銃筒)을 거치하여 사격하면서 일본군의 토산에 맞대응했다.

장군정과 대장군전을 장착하여 방렬한 각 총통 모형(진주성)

그러나 28일의 격전에서는 황진이 일본군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29일에는 비가 내려 화공이 불가능한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군이 성벽을 무너뜨리며 진입을 시도했다. 석성인 진주성 성벽의 방호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저항하다가 성벽이 무너지자 수성 부대의 항전역량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발굴 당시 진주성 외벽

일본군이 진주성 내부로 진입하자 저항하던 군민들은 근접전을 벌이면서 촉석루(矗石樓) 쪽으로 후퇴했다. 조선군 수성 부대 지휘부와 군사 3천여 명은 주민 6만여 명과 함께 진주성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29일 진주성에 입성한 일본군에 의해 성 내부는 모조리 초토화되고 말았다.(『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177〜181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남강의 단애와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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