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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한국의 성곽 공방전 7-3. 元軍의 남침과 귀주성 공방전(1231∼1232)

by 히스토리오브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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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초에 중국대륙 한족(漢族)의 강력한 통일제국 당(唐)나라가 멸망한 후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북방민족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대륙의 북방 초원지대에서 유목·수렵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거란·여진·몽골 등의 민족들이 강력한 신흥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농경민족인 송(宋)나라를 압박하면서 중국대륙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몽골 초원의 유목과 자연환경

이 무렵 중국대륙에는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밀리면서 시작된 이른바 남송(南宋∶1127∼1279) 시대와 거란족의 요(遼)나라가 금나라에 멸망한 시기가 80여 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이같이 강성하던 금나라가 13세기에 접어들자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즉 내부 혼란이 심화하는 가운데 그들의 영향권에 있던 거란 유족(契丹遺族)이 이탈하는 등의 혼란으로 인해 대내외적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란족 생활 풍속도

북방민족의 대두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중국대륙의 송나라와 함께 동북아에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高麗)에도 불어 닥쳤다. 최씨 무인 정권이 지배하던 13세기 초 고려에 몽골의 영향력이 미치게 된 것이다.

몽골족은 거란 유족이 금나라 치하에서 부흥 운동을 전개하자 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란 유족의 세력이 강성해질 기미를 보이자 오히려 무력토벌을 단행하여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이중성을 노출하고 있었다.

압록강의 관문 통군정(평북 의주)
복원된 통군정

이러한 몽골과 고려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은 거란 유족이 몽골족의 토벌 작전에 밀려서 1217년 압록강을 넘어왔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거란 유족을 추격하여 고려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고려는 몽골과 동진국(東眞國) 군사의 지원을 받아 1219년(고종6)에 강동성(江東城∶평남 강동군)에서 농성하고 있던 거란 유족을 토벌한 후로는 몽골의 수교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수교 이후로 몽골이 공물(貢物)을 과중하게 요구하고 정치적으로도 무리한 압박을 강요했기 때문에 고려의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고려는 전통적으로 요·금과 교류하면서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식으로 교역해왔다.

강동군 산야

그러나 몽골은 이들 나라와 차이가 있었다. 마치 점령군처럼 무상 징발이나 다름없는 무리한 요구로 고려에 고통을 주었다. 고려가 불평등한 협약을 체결하고 수교한 이후로 몽골로부터 받게 된 부담이 너무 컸다. 따라서 고려의 몽골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양국관계를 단절하는 사태로 몰고 간 몽골 사신 피살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 사신 자꾸예(著古與)가 1225년 1월 함신진(咸新鎭:평북 의주)을 거쳐 귀국하던 도중에 압록강 북안에서 살해된 것이다.

당시 자꾸예가 피살된 정확한 지점을 알 수는 없으나, 몽골은 고려가 살해한 것으로 단정했다. 따라서 보복침공의 기회를 노리면서 양국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압록강 북안에서 본 통군정(의주)

이 사건에 대한 양국의 시각 차이는 매우 컸다. 몽골은 고려가 살해한 것으로 단정하고 일방적으로 국교를 단절해 버렸다. 결국, 양국 간 감정 대립이 자꾸예 피살 사건을 계기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대립상황이 현실 문제로 급부상한 것은 1227년 8월 칭기즈칸이 사망하고 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窩濶台)가 1229년 태종(太宗)으로 즉위하면서부터였다. 자꾸예 피살 사건 이후로 고려에 대한 보복침공을 주장해 온 강경파의 중심인물이 태종 오고타이였기 때문이다.

오고타이 칸 초상화(부분)

몽골의 고려 침공군은 기병 3만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1231년 8월 초순 집결지 요양(遼陽:요녕성 요양시)을 출발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는 1229년 고려와 함께 거란 유족을 토벌하는 강동성 전투에 몽골군 부원수로 참전했던 인물이다.

몽골군 남침 기동로(북로군)

갈수기(渴水期)를 이용하여 압록강을 도하한 몽골군은 남안의 함신진을 점령한 후 부대를 3개 제대로 개편하였는데, 본대와 남로군이 함께 기동하고 북로군(北路軍∶제4·5·6군)이 귀주(龜州) 지역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군이 귀주성에서 몽골 북로군의 공격을 받고 수성전을 전개한 결과 남진을 저지하여 작전 전반에 차질을 빚게 한 것이다.

귀주성 부근 지형도

고려군의 귀주성은 이미 1010년과 1019년에 거란족의 침입에 맞서 대규모 공방전을 전개한 결과 수성전에서는 승리했으나, 기습전에 패배하여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체험했었다. 1231년 9월 몽골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전개한 귀주성 고려군의 대응은 출성(出城) 공격을 자제하면서 수성 작전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귀주성 남문(1979년 복원)

고려군은 몽골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귀주성을 고수할 수 있었다. 귀주성 지휘부에 내분을 조장하여 항전체계를 와해시키려는 심리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몽골군의 귀주성 공성 작전은 주로 화공(火攻)이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에게 익숙한 작전은 아니었다.

공성장비를 이용한 몽골군 공성도

오히려 수성전을 전개하는 귀주성 고려군민들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몽골군은 나뭇단을 쌓아 올린 수레를 성벽에 접근시켜 성안으로 불길이 번지게 하는 전통적인 화공법을 비롯하여 성 밑으로 땅굴을 파고, 석포(石砲: 투석기)를 발사하여 성 내부를 압박했다.

화차(조선시대)

 

석포(투석기) 모형의 일반적 형태

기름에 적신 나뭇단에 불을 붙여 성안으로 번지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 몽골군의 공성 작전이 무려 1개월 동안 전개되었으나 고려군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공세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귀주성 1차 공방전 상황(1231.9)

그런데 1231년 10월 전개된 2차 공방전에서는 귀주성이 함락 위기에 직면한 때도 있었다. 몽골군이 투항한 고려 군사들을 공성전에 투입하고 곡사 무기인 포차(砲車)를 대거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하며 진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 후 12월에 전개된 3차 공방전에서 몽골군이 고가사다리인 운제(雲梯)를 동원하여 성벽을 넘으려고 하자, 고려군은 큰 칼날을 장착한 대우포(大于浦)로 대항하여 무력화시킴으로써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공성용 고가사다리 운제(전쟁기념관)
귀주성 2차 공방전 상황(1231.10)

이와 같이 귀주성의 고려 군민들이 수성 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몽골군이 보병으로 전환하여 공성 작전을 전개하는 데 따르는 취약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었다. 즉 몽골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기병 부대의 장점을 전혀 발휘할 수 없도록 출성 공격을 억제하고 신속한 대응태세를 유지한 것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87〜91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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