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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최고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82년에 죽은 후로 10여 년 동안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인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자신의 주군을 죽인 반군세력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는 1585년 9월부터 조선을 거쳐 중국대륙의 명(明)나라로 쳐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기어이 1592년 4월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임진왜란(壬辰倭亂, 일명 조일전쟁)’을 일으켰다.
조선군은 일본군 제1군과 최초 전투에서 실패하여 부산진성(釜山鎭城)과 동래부성(東萊府城)을 차례로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양산성과 밀양성이 무혈로 점령당하는 등 낙동강 이동의 경상좌도(慶尙左道)를 불과 수일 만에 일본군 수중에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군은 5월 3일에 조선 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하고, 6월에는 평양과 함경도를 지향하여 북상하였다. 국왕 선조(宣祖)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면서 요동(遼東)으로 망명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 무렵 근왕군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로 들어가 활동하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이 통과한 평양 이남 지역에는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와는 달리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며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의 최대 곡창인 전라도 지역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이 제해권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상전에서 평양성을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밀려났던 조선군은 명군(明軍)의 참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즉 명의 대규모 지원군이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차 탈환 작전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조선을 유린한 일본군이 중국대륙으로 쳐들어오는 상황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군의 북상을 조선 영역에서 저지하기 위해 1592년 6월 중순 요동부총병(遼東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하는 명군 3천여 명을 파병한 것이다.
요동지역의 명군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신속히 압록강을 도하한 후 평안북도 의주→순안을 거쳐 7월 17일 새벽 평양성 부근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상황보고에 따라 평양성 탈환 작전을 서두르게 되었다.
일본군은 명군을 평양성으로 유인하기 위해 ‘평양성에서 남쪽으로 철수하고, 소수 병력만 남아있다’라고 거짓 정보를 유포시켰다. 이는 명군 지원부대가 최초로 전개한 평양성 탈환 작전이 실패하는 단초가 되었다. 명군 지휘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텅 빈 평양성의 보통문(普通門)과 대동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진입했다.
후미 부대가 보통문을 통과할 무렵 일본군 매복조의 기습공격을 받아 주요지휘관들이 다수 전사하고 사령관인 조승훈도 상처를 입은 채 평양성을 빠져나왔다. 18일 아침 안주성(安州城)에 도착한 조승훈이 병력을 수습하여 요동으로 철수함에 따라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명은 조승훈이 지휘한 1차 탈환 작전이 실패하자 충격을 받고 대대적인 재출병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내 반란세력을 토벌해야 하는 사정으로 말미암아 출병을 유예한 채 일단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8월에 긴급 파견된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이 9월 1일부터 50일간 시한부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 후 명은 내란이 진압되자 삼군(三軍)으로 편성된 ‘동정군(東征軍)’ 4만여 명을 파병하였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선전했다. 동정군은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지휘하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 용만관(龍灣館)을 거쳐 이듬해(1593) 1월 초순 경 안주(安州)→숙천(肅川)으로 진출하고, 6일에는 평양성 근교까지 남하했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김명원이 지휘하는 1만여 명의 조선군도 평양성 근교로 이동하여 공성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명군은 조선군의 지원을 받아 평양성 서북면을 포위하였다. 남쪽으로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둔 것이다.
명군을 주력군으로 삼고 조선군이 지원하는 형태로 전개된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공격전은 전통적으로 외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개하던 수성전의 양상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 조선군과 명군이 연합하여 공성전을 전개하는 역전된 양상이었다. 평양성의 주변 지형은 물론 내부구조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조선군이 명군 지휘부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서, 조공 부대로 참전한 상황이다.
명군은 모란봉(牡丹峰)·칠성문(七星門)·보통문을 공격하고, 조선군은 명군 일부와 함께 함구문(含毬{門)으로 공격 방향을 나누었다.
조·명군은 1월 8일 아침부터 평양성 성벽과 성문을 향해 대포 공격을 집중했다. 포격이 끝나자 참장 낙상지 군이 함구문, 우협대장 장세작 군이 칠성문, 좌협대장 양원 군이 보통문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조선군은 이일과 김응서의 지휘하에 함구문으로 접근해 일본군의 방어망을 돌파한 후 성안으로 진입하였다. 결국, 평양성 외성(外城)을 점령하고 중성(中城)으로 돌입하여, 일본군을 만수대(萬壽臺)와 을밀대(乙密臺) 방면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최후 저항선에서 명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사령관 이여송이 군대를 성 밖으로 철수시킨 다음,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벌였다. 명군 수뇌부가 일본군 측이 제시한 안전한 철수조건을 수용함에 따라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자진 철수한 후 대동강을 건너 남하했다.
일본군이 야음을 틈타 평양성을 빠져나가자 조선군과 명군은 1593년 1월 9일 입성하여 7개월 만에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기병 중심의 북병(北兵)과 보병인 남병(南兵)이 갈등을 노출시켰다. 이는 차기 작전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측면이었다.
그러나 평양성 공성전을 통해 조선군과 명군은 승기를 잡고 공세로 전환하여 광범위한 지역을 빠른 속도로 회복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129〜133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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