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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5세기 초 광개토왕(廣開土王:391∼412)대에 이르러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반도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6세기 초반까지도 군사적 우위를 지속하면서 고구려는 여전히 동북아의 강국이었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413∼491)시대에 이르러서는 우리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대륙은 이른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이 남북조 시대를 맞이한 가운데 동북아의 고구려는 서북 국경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리적으로 근접한 북조의 북위(北魏)와 선린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면 북위와의 관계를 먼저 개선해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군소 세력 집단간 정쟁으로 인해 집권층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 세력 판도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북주(北周) 왕실의 외척이던 양견(楊堅)이 581년 수(隋)나라를 세우고 통일 전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나라와 대립하자 ‘등거리(等距離) 외교’를 추진하여 이들 두 나라와 동시에 국교를 수립하고 있었다.
589년 수나라는 중국대륙을 무력으로 통일한 후 대고구려 정책을 강경책으로 바꾸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는 냉각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598년 2월 수문제(文帝)의 북방정책 추진 거점인 영주(營州:요녕성 조양시) 지방을 선제공격했다. 이른바 선방을 날린 것이다. 결국, ‘고·수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그해 6월 탁군(涿郡:북경 근교)을 출발한 수나라 1차 침공군은 요하(遼河) 일대에서 자연재해를 만나 퇴각하고 말았다.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즉위한 후로 612년 1백 만이 넘는 수·륙군으로 2차 침공을 감행했으나 별동부대 30만 대군이 살수 전투에서 섬멸적 타격을 입자 또 퇴각했다. 613년의 3차, 614년의 4차 침공도 수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결국, 수나라는 전쟁의 실패와 이로 인한 내부 반란세력의 발호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멸망하게 되었다. 수양제의 이종사촌인 태원(太原) 유수 이연(李淵)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618년 당(唐)나라 황제로 즉위했다.
고구려군은 주요거점에 축성된 성곽을 중심으로 수성전을 전개하여 수나라 침공군의 발목을 잡았다. 공성 부대에 불리한 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수성 작전으로 시일을 끌어서 수군의 속전속결 전략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4차에 걸친 수군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는 대외적 위상을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장기간 전시동원 태세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는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와의 전쟁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악재가 되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즉위 후 10여 년이 경과한 7세기 중반 무렵에 이르자 앞서 수나라가 장악했던 영역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리고 640년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킨 후로는 자신감을 회복한 듯 대외 강경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고구려에서도 강경파 연개소문(淵蓋蘇文)이 642년 10월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보장왕(寶藏王:642~668)을 옹립하자 강경노선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즉 7세기 중반에 들어서 양국 모두 강경세력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활동도 당과 고구려의 관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642년 8월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군)을 빼앗긴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앞서 신라가 장악한 한강 유역을 되돌려 주는 조건부 지원을 제의했기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었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중재마저 거부했다. 당의 침공야욕은 한층 노골화되었다.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3) 1월 수나라를 위해 고구려에 복수하고, 국왕을 교체시킨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일부 중신들은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무리한 고구려 침공에 있다며 태종의 친정(親征)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당은 군량을 바닷길로 수송하는 가운데, 영주 도독이 지휘하는 영주 및 유주(幽州:북경 일대) 군사를 주축으로 거란·해(奚)·말갈군도 포함하여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 당의 보·기병과 함께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북방민족들을 끌어들여 다민족군(多民族軍)을 편성했다.
11월 초 낙양에 도착한 당 태종이 과거 고구려 침공에 참전했던 전 의주(宜州) 자사 정원숙(鄭元璹)에게 견해를 물었다. 그는 요동까지 길이 멀고 군량 수송이 곤란하며, 고구려인들의 수성전술(守城戰術)이 뛰어나므로 쉽게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과거 수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군 4만 3천여 명과 전함 5백 척은 평양도 행군 대총관 장량(張亮)이 지휘하여 산동반도의 내주(萊州)에서 고구려 수도 평양을 지향하고, 투항군이 포함된 육군은 보·기병 6만으로 요동도 행군 대총관 이세적(李世勣) 지휘하에 쳐들어왔다. 즉 10만이 넘는 대군이 투입된 것이다.
당군은 644년 12월 유주에 집결하자 운제(雲梯)·충차(衝車) 등과 같은 공성 기구를 제작하여 각 부대에 지급했다. 공성전을 전개할 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원거리를 수송하는데 고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5월 중순 12일 동안 화공작전(火攻作戰)으로 요동성(遼東城)이 떨어지고, 백암성(白巖城)이 자진 투항하자 당군이 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 태종이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안성(建安城)보다 안시성(安市城)을 먼저 공격하였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약 2개월이 넘도록 당군의 발목을 잡았다. 시일이 지체되면서 피해만 불어나자 당군은 스스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의 고구려군 최고 지휘관이나 군사력 등에 관해서는 역사에 자세하지 않다. 앞서 쿠데타로 집권한 연개소문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과 군민의 단결력을 갖춘 성이라는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한차례 출성 공격을 시도하다가 피해를 입은 후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수성전으로 일관했다. 당군은 요동성에서 성과를 거둔 각종 공성 장비를 투입하고 화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성안을 관측할 수 있는 인공 토산(土山)을 축조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기습적으로 토산을 점령하고, 3일 동안 당의 총공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치자 당군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갔다. 고구려군이 안시성에서 수성 작전으로 시일을 끌자 어느덧 요동지역에는 초겨울의 추위가 시작되었다.
때마침 북방민족은 남침하여 당의 국내 안정을 위협했다. 이 같이 불리한 안보환경이 야기되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3〜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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