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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생활권으로 하기 때문에 북방민족(北方民族) 중 하나로 불리는 거란족(契丹族)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은 당(唐)나라가 말기적 혼란상을 노출시키는 틈을 타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당의 강력하던 이민족 통치 정책이 약화된 상황이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거란족 지도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10세기 초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五代)의 혼란기를 맞이하자 중원의 지배자를 꿈꾸며 요(遼)나라를 건국하고(916), 주변 세력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渤海)도 926년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한동안 거란족 내부의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면서 대외팽창 정책이 탄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국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안정을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말 성종(聖宗)이 즉위한 이후부터다.
고려는 거란족의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자 무도한 나라로 단정하고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다. 건국 초기인 942년 (태조25) 10월 요나라가 3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선물하면서 수교를 요청해도 무시해 버렸다. 요나라가 발해를 배신하여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기 때문에 교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는 대외정책과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려는 북진정책을 함께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에 대한 강경 기조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는 요나라에 대한 적대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요나라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부적 안정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외 강경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중국대륙에서 960년 송(宋)나라가 한족의 통일왕조로 들어섰기 때문에 변화의 추이를 관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고려와 송나라가 교역을 확대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자 요나라의 조바심도 커져갔다. 고려가 송-요나라와의 삼각관계 속에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해도 요나라가 고려를 후방 위협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공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나라가 정국의 안정을 기반으로 대외팽창에 관심을 돌리자 여진족(女眞族)이 가장 먼저 영향을 받았다. 983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요군의 공격을 받은 여진족들은 고려 영역인 회창(懷昌)·위화(威化)·광화(光和)지역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압록강 일대를 생활무대로 하는 여진족 대부분이 요나라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당시 고려는 요군은 물론 여진족과도 무력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요나라와 고려의 완충지대가 사라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접촉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는 요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984년(성종3) 압록강 부근 요충지에 축성작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지역 일대를 생활권으로 삼고 있던 여진족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축성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후로 여진족이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자 고려가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고려가 985년 송나라에 사실관계를 적극적으로 해명한 것도 여진족의 모함에서 벗어나려는 방편이었다. 고려가 요나라의 침공을 처음 받은 것은 993년이다. 그해 5월 고려의 서북계(西北界)에 거주하는 여진족이 요군의 침공계획을 고려 조정에 알려 주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여진족의 속임수로 단정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8월에 다시 요군의 침입을 통보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을 서둘렀다. 그해 10월 고려는 주력군을 상·중·하군으로 편성하고 시중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徐熙)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로 임명하여, 북계(北界) 주요지역에 배치했다.
당시 고려는 성종(成宗)이 재위하고 있었고, 요나라는 성종(聖宗)의 시대였다. 요의 성종은 12세인 982년 즉위하여 10여 년이 경과하던 993년 고려 침공을 감행했는데, 왕비의 친척이며 자신의 외척이기도 한 동경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 字:遜寧)을 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는 소손녕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무렵 고려 성종도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윤10월 서경(西京, 평양)을 거쳐 안북부(安北府, 안주)로 북상하여 머물렀다. 그러나 봉산군(蓬山郡)이 요군 수중에 들어가자 도성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때 요군 사령관 소손녕이 수차례 전령을 파견하여 항복하도록 요구해 왔다. 특히 80만 대군이 후속 부대로 도착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고려 성종이 서경 이북지역을 요나라에 넘겨주고 국경선을 후퇴시키자는 중신들의 건의에 귀 기울일 정도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중군사로 참전한 내사시랑 서희가 이를 반대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중군사 서희는 군량이 풍족하면 수성(守城)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성종의 결심을 바꾸었다. 그 후 서희는 고려의 대표로서 요군 지휘부와 협상을 전개하였다. 정연한 논리로 요군 지휘부를 설득하여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하고 스스로 철군하게 했다.
이후로 양국은 한동안 소강적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요군이 송나라를 침공하여 1004년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고 ‘형제 관계’를 수립한 이후부터 관계가 악화되었다. 요나라는 고려가 송나라와 비밀리에 교류하면서 요나라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특히 고려에 영유권을 인정해 준 ‘강동 6주’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는 등 요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태도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요나라는 배후의 위협세력을 제거하고 강동 6주를 환수하기 위해 재침 기회를 노리던 중인 1009년 고려에서 ‘강조(康兆)의 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트집 잡아 1010년 10월 다시 쳐들어 왔다. 앞서 요나라는 이미 5월부터 동여진을 통해 고려의 국내 정변과 정세 혼란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요나라의 2차 고려 침공에는 40만이 동원되었다. ‘의군천병(義軍天兵)’으로 명명된 이들은 1010년 11월 중순 흥화진성(興化鎭城)에서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이를 우회하여 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흥화진성의 고려군이 요군의 공성 작전과 심리전을 극복하면서 수성 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병의 기동력이 장기인 요군의 특성을 역이용하여 출성 공격을 자제하고 수성전에 전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흥화진성의 고려군이 전개한 수성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대체로 기병인 요군이 보병으로 전환하여 성벽에 접근하거나 기어오를 때 이를 저지하는 전통적인 공성 기구와 장비들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이로 인해 흥화진성에서 정체되었던 요군은 기병의 특기인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시일만 지체되자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요군의 기동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고려군이 방어태세를 정비 강화한 것도 큰 위협이 되었다. 이 같은 작전환경 속에서 마침 고려가 화의를 요청하자 요군지휘부가 이를 수용하고 결국 철군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43〜4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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