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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6】 제2차 나선 정벌-철수 문제. 2-2

by 히스토리오브 202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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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조선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조선군은 닝구타로 출발하지 못한 채 일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야영을 하면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후다가 청군 부상병들을 닝구타로 후송하도록 지시한 78일 신류 사령관도 군관 유응천(柳應天)의 인솔 아래 중상을 입은 포수 15명과 화병 3, 수솔(隨率) 2명을 닝구타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도록 했다. 나머지 군사들도 야영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소나기와 우박이 내리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일기불순마저 겹쳤다. 신류 또한 귓병이 악화되고 감기 몸살 증세도 나타났지만 주변에 의료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참을 수밖에 없었다.

7월 중순에 접어들자 식량 수급 대책이 더욱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20일 경에는 조선에서 가지고 온 식량이 거의 떨어질 형편이었다. 닝구타에서 회령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10일분 식량을 미리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청군 측에서 빌려준 식량도 개인별로 분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각각 분산 배치된 상황에서 배분했기 때문에, 많은 경우는 6~7말을 받고 적게는 4~5말을 받아서 편차가 심했다. 또 처음부터 물에 젖어서 썩은 경우도 적지 않아 청군 측에 되갚을 때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군량 부족과 썩은 양곡의 문제점을 대통관 이몽선과 상의하기 위해 조선 통관 김명길이 파견되었다.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에게 보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미 수차례나 통역관들에게 부탁했으나 그 때마다 전달조차 거절했기 때문에 청군 사령관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몽선이 날짜를 계산하여 지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썩은 군량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로 거절하여 신류의 애간장을 태웠다.

이에 신류는 통역관을 거치지 않고 사르후다에게 직접 전달하여 그의 협조를 받아내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인들이 조선의 특산 담배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 통역 김명길을 보내 상등품 10여 갑을 전달하면서 썩은 양곡의 문제점을 시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사르후다는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대통관을 통해 일찍 보고했더라면 당연히 조치해 주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신류는 그의 말대로 조치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면서도 통관들이 중간에서 가로막아 전달조차 안 된 것보다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체감온도가 남쪽 지방의 겨울철보다 더 춥게 느껴지자 야영하는 군사들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신류는 721일 김명길을 대통관 이몽선에게 보내서 기온이 내려가는 날씨로 인해 군사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고, 사르후다에게 알려서 조치를 받을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이몽선이 비로소 8월 초순에 철군하기로 결정된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튿날 이몽선은 신류의 건의사항을 사르후다에게 보고하고 돌아와 조만간에 철군 명령을 내릴 것이라는 답변을 전달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철군 일자가 임박한 것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신류는 기쁨과 동시에 군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군량이 도착한 후에 철군하면 그동안 수송비도 문제려니와 수레가 돌아간 뒤 다시 가져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50일분 군량이 7월 말경 닝구타에 도착하면 반송할 방법이 없으니, 조선군의 남는 쌀을 청군 측에서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앞서 조선군 측에서 청군 사령관의 측근 인사를 통해 군량 문제를 건의한 사실이 통사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당시 참전한 청군 측 통사는 이몽선·이기영·김대헌·윤손(尹孫)인데, 조선인 출신으로 보이는 이들은 자신들의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트집을 잡고 신류를 괴롭혔다. 이들은 청군 지휘부에 보고해 주지도 않고 조선군을 위해 특별히 주선해준 일도 없으면서 오히려 사소한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매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등 만행을 일삼았으니, 차라리 적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나날이었다.

723일에 조선군은 청군이 닝구타에서 수송해 온 돼지고기와 닭고기, 채소 등을 보급받았다. 특히 채소는 군사들이 조선 변경을 떠나온 지 무려 3개월 만에 처음 먹어보는 별식이었다. 귀국 일자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군사들은 고국의 가을을 생각하며 만리타향에서 겪는 고충에 한없는 서러움을 달랬다.

신류는 청군 통역관들과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이 심통을 부리면 청군 지휘부와의 관계에 또다른 마찰이 생길 수 있었고 결국 조선군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류는 724일 대통관 이몽선을 방문하여 함께 있던 김대헌과도 환담하면서 이들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주었다. 철군을 앞두고 있는 상황인데 조선에서 수송해 온 군량이 도착한 후 군대가 철군하면 양곡의 절반을 수송비용으로 길바닥에 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천리 먼 길을 수송해온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들의 협조를 얻어내려고 조선에서 가져온 선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의 일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청군에게 빌려 온 양곡의 재고량과 처분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철군 일자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앞서 청군으로부터 빌려 온 군량미의 잔여분을 반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같은 신류의 절절한 요청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이몽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철군일은 85일을 넘지 않을 것이며, 넉넉잡아 815일까지 먹을 분량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청군에 반납해도 좋을 것이라는 이몽선의 답변을 얻어낸 것이다. 통사들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신류는 지난번 러시아 원정대와 접전할 때 조선군이 노획한 신형 소총을 돌려받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러시아 원정대의 소총이 조선 조총과는 구조가 크게 다른 새로운 무기이므로 몇 자루 입수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싶다는 충정을 내비친 것이다.

신류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통사들은 이 사실을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에게 보고하고 성사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때 이몽선도 신류에게 요청을 했다. 북경에 보고서를 가지고 간 청군 지휘관이 닝구타로 돌아온 후에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복귀가 늦어지면 또 다시 닝구타에서 대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726일 신류는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의 부름을 받고 그의 군막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양군 사령관은 질병이나 부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도보 행군이 불가능한 군사들과 각종 개인 장비를 선박으로 수송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8일분 개인 식량만 휴대한 채 걸어서 복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사르후다와 신류가 직접 대화를 나눈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 통역관들이 중간에서 의사를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일이 확인할 계재도 아니어서 대부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대통관 이몽선이 주선해 주기로 한 조총을 되돌려 받는 문제도 제대로 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신류는 사르후다와 대면한 자리에서 이번 승리를 높이 평가하면서 앞서 노획한 러시아 원정대의 신무기를 몇 자루 입수하여 개선하고 싶다는 의사를 직접 전달했다. 그러나 사르후다는 노획한 무기의 목록을 작성하여 북경 조정에 이미 보고했기 때문에 다시 북경의 조치를 받아야 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당시 신류는 조선군과 청군이 300 내지 400정을 노획했는데, 북경 정부에 보고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소총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사르후다의 처사를 매우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욕심 많던 닝구타 암반장진 사르후다도 이듬해(1659) 61세로 병사하고, 아들 바하이(巴海)가 그 직책을 세습하게 된다.

신류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28일 청군 진영에서 보내 준 러시아 원정대 소총 1정을 입수하여 개선할 수 있었다. 수석식으로 불리는 러시아제 신식 소총이 안에는 삽화철(揷火鐵)이 있고 밖에는 방하철(放下鐵)이 있어서 방아쇠를 당겨 부싯돌을 내리면 돌과 쇠가 서로 부딪쳐 불을 일으키기 때문에 매우 신기해서 사령관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총의 특징과 반드시 얻어가려고 애쓴 이유를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조.청군과 조선군의 수상 및 육상 철수로(구글지도 참조)

조선군은 철군을 앞둔 81일 조총수 3명이 잇달아 전염병으로 의심되는 질병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군사들이 장기간 숙식하는 열악한 주거 환경 때문에 발병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튿날에는 도보 행군이 불가능한 군사와 군수품을 수송할 선박 3척이 배당되었는데 물동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여 애로사항이 매우 많았다.

앞서 청군으로부터 빌린 군량을 반납하는 과정에서도 억울한 일을 겪었다. 빌려줄 때는 작은 말로 계산했는데, 받을 때는 큰 말로 계산하니 무려 10섬이나 추가 부담하는 손해를 본 것이다. 물질적인 손실에 정신적 고충까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조선군은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준비를 완료한 84일부터 비로소 주둔지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청군 선박이 먼저 출발한 뒤 시차를 두고 조선군 선박 3척이 출발했다. 수심이 얕고 빠른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항진 속도가 매우 느렸다. 도보로 행군하는 군사와 이동 속도가 비슷하여 도중에 환자가 발생하면 교대로 승선시킬 수도 있었다. 느린 항진으로 13일 저녁 무렵에 겨우 닝구타에 도착했으나 사지를 무사히 빠져나온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닝구타에서 도보 행군 부대와 선박이동 부대가 합류한 이튿날인 14일 청군 측이 마련한 송별연에 초대받았다. 이때 청군 측으로부터 북경의 명령이 도착할 때까지 며칠만 더 기다려달라는 뜻밖의 요청을 받고 신류는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류는 더이상 체류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철군에 필요한 10일분 군량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청군에 반납했을 뿐만 아니라 땔감을 조달하기도 곤란하여 군사들이 취사를 못할 지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르후다는 신류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 조선군의 귀국 지연에 따르는 애로 사항들을 모두 해소해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닝구타에서 또다시 대기하게 되었다.

이같이 지지부진한 철군 과정에서 희생자도 발생했다. 종성에서 참전한 윤국생(尹國生)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투병하다가 814일 닝구타 현지에서 병사한 것이다. 본국까지 운구(運柩)할 수 없어서 닝구타 외곽의 남쪽 산기슭 길가에 묻어주었다.

영고탑(닝구타)장군 주둔유적지 표지석(네이브 블로그)

청나라 조정의 지시 사항이 도착하자 조선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예물도 함께 왔다. 담비가죽 갓옷인 초구(貂裘)가 한 벌 도착했다는 전달을 받고 신류가 직접 청군 사령부로 가서 수령한 후 청군 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비가 내리는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혹시나 상황이 돌변하여 또다시 대기하라는 소리가 나올까봐 한시라도 빨리 청군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청군과 헤어진 첫날밤인 19일 찬 서리가 눈처럼 내린 백자령(栢子嶺) 기슭의 노전동(蘆田洞)에서 숙박했다. 이동할 때는 군마 10필에 환자들을 교대로 태우면서 회령을 향해 행군 속도를 높였다. 21일은 아미단(阿彌壇)이라는 곳에서 머물렀다. 이때 조총수 5명을 회령 부사에게 보내 출병부대가 개선한다는 소식을 한발 먼저 알리도록 했다. 회령 부사는 이 소식은 파발을 통해 조정에 보고할 터였다. 회령에 가까워질수록 군사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건강이 나빠서 걸음이 불편하던 군사들도 힘을 내서 길을 재촉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하여 닝구타의 청군과 더욱 멀리 떨어졌다. 때로는 꿈같은 지난 일을 회상하다가 함께 귀국하지 못한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무리한 강행군으로 하루 온종일 휴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드디어 26일 저녁 무렵에는 두만강 북안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저물고 강물의 수위도 높아서 한꺼번에 모두 도강할 수는 없었다. 70여명이 먼저 강을 건너고 나머지 인원은 이튿날 아침 일찍 건너기로 하고 강변에 대기하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827일 아침부터 도강을 서두르다가 길주에서 참전한 조총수 박선(朴先)을 포함한 4명이 탄 나룻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그들의 조총은 건지지 못한 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험과 역경을 이기고 이날 저녁에 비로소 회령의 행영에 도착함으로써 멀고도 험난했던 나선 정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회령과 행영의 위치(대한민국전도, 1:1,000,000)

2차 나선정벌군도 1차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에게 귀국 신고를 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것이나 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신류는 귀국 후에 평안도 선천 부사, 현종 대에 경상좌수사·용양위 부호군·전라좌수사·경상좌병사·황해 병사 등을 거쳐 1675(숙종1)에는 삼도수군통제사·포도대장을 역임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수난을 겪은 것은 오히려 1680(숙종6) 62세로 사망한 후였다.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정계에서 쫓겨날 때 신류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689(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그 이듬해 다시 모든 관직이 복원되었다.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수사로 임명하는 교지
신류 장군 신도비(네이브 블로그, 경북 칠곡군 약목면)
신류 장군 교서

한편 신류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러시아제 수석식 소총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827일 두만강에서 일어난 전복사고 때 다른 조총과 함께 빠트려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성공적으로 반입했다면 효종이 군기시(軍器寺)로 보내 신무기 개발에 참고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조총은 19세기 중엽까지도 별다른 변화 없이 재래식 화승총에 머물러 있었다. 신류가 반입한 러시아제 신형 소총이 조선제 신형 조총을 개발하는데 활용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증거였다.(《조선의 대외정벌》421~430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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