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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2】 제2차 나선 정벌-헤이룽 강으로 출동하다(2-1)

by 히스토리오브 202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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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너머 만주로 

조선군 신류 사령관이 남긴 《북정록》을 중심으로 제2차 출병 전체 과정을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신류는 《북정록》이 시작되는 1658년 4월 6일 회령부에서 조총수의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최초로 실시한 조총 사격 훈련에서 51명이 표적에 명중시켰다. 몇 명이 사격 훈련에 참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족스러운 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 이튿날에는 군사들에게 개인 장비를 지급하면서 철저히 정비하도록 했다.

16일 경원 부사가 송별연회를 열어준 데 이어 18일에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김시성이 위로연을 베풀어 이들의 장도를 격려했다. 북병사 김시성은 경상 병사를 거쳐 전년도 6월에 부임한 무신 출신이다. 그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시고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따라 선양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북병사로 부임했는데, 자신의 부하들이 이역만리 낯선 곳으로 출정하자 이들을 격려하고 건승을 빌어주기 위해 위로연을 마련한 것이다.

회령 서쪽에서 본 회령읍(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1914)

이튿날(19일) 장병들은 북병사에게 출정 신고를 마친 후 회령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출정 부대가 완전히 편성된 것은 아니었다. 사격 훈련을 실시한 21일에 군관 박대영(朴大榮)과 통역관 김명길(金命吉), 22일 군관 유응천이 신류 사령관에게 합류하는 신고를 마쳤다. 이때 신류는 회령 부사 민진익(閔震益)을 만났다. 그러나 그가 부스럼 병을 앍고 있던 조총수를 강제로 출병시킨 인물이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신류는 훗날 피부병 환자를 출정부대에 포함시킨 민진익을 크게 원망했다.

오국성에서 본 두만강과 회령(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1911~1912)

이와 같이 출병 준비를 갖추면서 청국에서 파견한 통역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30일 새벽에 회령 북쪽 20여리 떨어진 고령진(高嶺鎭)에서 급보가 들어왔다. 조선군을 안내할 청나라 통역관들이 전날 밤 술시(戌時, 19:00~21:00)에 입국하여 회령으로 직행했다는 소식이었다. 행영에서 보고를 받은 신류는 즉시 회령으로 이동하여 수석 통역관인 대통관 김대헌(金大獻)과 차통관 윤수(尹守, 윤손尹孫) 그리고 수행관인 차관(差官) 단필(丹必)을 객사(客舍)에서 만났다. 이들은 출병 일자가 급박하다고 조르면서 내일 중으로 두만강을 도하하도록 강요했다. 신류는 이날 군량미의 태반을 두만강 이북으로 미리 수송하여 출동에 대비했다.

회령 고령진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1911~1912)

조선군 출정부대는 1658년(조선 효종 9, 청 세조 순치 15) 5월 1일과 2일에 걸쳐 회령 고령진에서 두만강을 도하한 다음, 고령진 대안의 고라이령(古羅耳嶺)을 통과했다. 그리고 앞서 1654년 변급의 제1차 출정부대가 지나갔던 허룽(和龍)-옌지(延吉)-왕칭(汪淸) 등을 경유하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오늘날 하이란 강(海蘭江)과 푸르하퉁 하(布爾哈通河)로 추정되는 강을 건너면서 강행군을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5월 4일부터 큰 비가 내려서 고통이 더욱 심했다. 군사들과 군마가 진흙탕에 빠지는 등 어려움을 겪어 행군이 더욱 힘들고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회령부에서 북상한 경로(구글지도)

그러나 청국 통역관들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다그쳤다. 5일부터 날이 개자 그동안 지체된 일정을 보충하려는 듯이 강행군을 요구할 뿐이었다. 조선군이 준비를 완료한 채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군 측의 연락이 지연된 책임이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독촉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신류의 항의도 묵살해 버렸다. 결국 조선군은 선발대를 편성하여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 인력과 장비를 후속부대로 편성했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이나마 부대가 두 토막이 나기도 했다.

당시 조선군의 작전 지휘권은 청군 지휘관에게 있었다. 1차 출병 때와 마찬가지로 양국의 관계상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군이 파견한 일개 통역관이 무리하게 강요해도 신류가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 청군 사령관의 지시를 빙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조선인 출신인 대통관 이몽선은 작년에도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조선에 입국하여 조총 100자루를 선별하여 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북쪽으로 150여리 떨어진 봉황성으로 가지고 간 인물이다. 이때 가져간 조총이 제2차 정벌작전에 참전한 청군에 지급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펑청시 봉황산 유원지 입구(2012)

아마도 조선에서 징발된 조총은 당시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 잔여 세력과 싸우고 있던 청군 주력 부대에 지급되어 전력 증강에 기여했을 것이다. 신류는 청군의 조총이 조선이나 왜국의 조총과는 종류가 다르며 청나라 병부(兵部)에서 지급해준 총기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조선에서 가져간 조총이라면 신류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는 것이다.

이몽선의 요구에 따라 강행군하여 5월 8일 홀가 강으로 불리는 무단 강(牧丹江)에 도착하자 소형 선박 1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너무 소형이라서 이튿날 오전까지 계속해서 도하 수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혹독하게 시달린 군마 한 필이 쓰러졌다. 단천에서 징발된 이 말은 최초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무단 강 지역 주민(다움카페, 1929)

조선군은 도강 후에 다시 강행군으로 북상하여 5월 9일 해질 무렵 닝구타에서 청군과 합류했다. 당시 닝구타는 새로운 군사도시로 위상이 올라가고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1652년 4월 하이서가 1,500명을 이끌고 우잘라(아찬스크)의 하바로프 원정대를 기습했다가 패전하여 해임된 후 사르후다가 닝구타 메이렌장진으로 부임했다. 이듬해(1653) 사르후다가 암반장진으로 승진하자 닝구타는 선양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왔다. 선양과 함께 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주요 거점도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군 제2차 출병 때인 1658년 무렵에는 이미 선양과 대등한 위상을 가질 정도로 발전한 군사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조.청군 합류지점 닝구타(구글지도)

조선군은 닝구타 성 북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통관 이몽선과 차통관 이기영(李起榮)의 영접을 받고 거기에서 야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류는 청 세조(순치제)가 하사한 환영 만찬에 참석하여 닝구타 성주의 안내에 따라 황제에게 올리는 의식인 고두례(叩頭禮)를 행하고 술 3잔을 마신 후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날이 샐 때까지 군사들을 독려하여 군량과 각종 군수품을 옮겨 실었다.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가 이미 출동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출발하여 합류해야 한다는 대통관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청 세조 순치제(네이버블로그)

조선군은 밤샘 작업을 하고 눈도 잠시 붙이지 못한 채 10일 아침 일찍부터 청군과 함께 출발하여 비를 맞으며 30여 리를 행군한 뒤 겨우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신류는 대통관의 안내를 받아 청군 사르후다의 막사를 방문하여 상견례를 마친 후 차를 대접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때까지 회령에서 따라 온 마부 39명에 대한 언급이 일기에 보이지 않는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닝구타에서 임무를 종료하고 회령으로 돌아간 것으로 짐작된다.

5월 11일 날이 개자 선박으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옮겨 싣고 조선군 조총수 200명은 다시 분산되었다. 8명의 청군 지휘관 예하부대에 각각 24명씩 배치된 것이다. 청군 지휘관 8명은 여진족의 독특한 군제인 팔기(八旗)제도에 따른 지휘관들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정황기(正黃旗)․정백기(正白旗)․정홍기(正紅旗)․정남기(正藍旗)로 시작했다가 점차 병력 규모가 확대되면서 양황기(鑲黃旗)․양백기(鑲白旗)․양홍기(鑲紅旗)․양남기(鑲藍旗)가 추가되어 팔기로 증가한 것이다.

팔기군 복장과 팔기 색상(나무위키)

한편 192명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은 수석 통역관인 대통관 이몽선과 차통관 이기영 휘하에 각각 4명씩 분산 배치되었다. 대통관 일행은 호위 군사로 짐작되는 2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군 사령관 신류는 화병과 수솔 등 나머지 비전투원 60명만 인솔하는 셈이 되었다.

조선군은 청군 휘하에 분산 배치된 후 12일 새벽부터 현지 주민들과 그들의 선박을 동원하여 무단 강하류로 내려갔는데, 배를 다루는 솜씨가 익숙하여 운항시간을 단축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동하던 도중인 13일부터 큰 배 10척이 투입되자 그동안 청군 지휘관에게 배속되어 작은 배를 타고 가던 조선 조총수 64명이 옮겨 탔다. 배를 잘 다루는 와르카 부족 사람이 배를 만들고 노를 젓기도 했다.

정비 공사 중인 무단 강변(나무위키)

이날 선박이 뒤집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명천(明川) 조총수 옥립(玉立)이 승선한 통나무배가 여울목을 통과하다가 암초에 부딪쳐서 전복된 것이다. 싣고 있던 군장과 조총을 강물에 빠트렸으나 철저히 수색하여 조총만 겨우 건져 올렸다. 명천에서 참전한 포수들은 16명인데 이들에게 조총은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무기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터에 나간 군사에게 개인화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장비다.

일란에 도착하기 직전인 14일에는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온 통나무배 1척과 마주쳤다. 이 배에는 와르카 부족 사람 4명이 타고 있었는데, 중요한 첩보를 전해주었다. 이미 러시아 원정대 전선들이 헤이룽 강 하구에 도착해 있어 하순경에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적군의 동태에 관해 처음 듣는 첩보였기에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후 항진을 계속하여 비가 내리는 15일 오전에는 무단 강이 쑹화 강과 합류하는 일란에 도착했다. 신류는 쑹화 강을 송가라강(宋加羅江)으로 기록했는데, 현지 원주민들이 부르는 강 이름 ‘쑹가리우라’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쑹화 강은 백두산 쪽에서 발원하여 북서로 흐르면서 지린 시를 통과하고, 쑹위안(松原)에서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흐른다. 하얼빈 시를 경유한 후에 일란에서 무단 강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량이 더욱 풍부해진다.

일란은 오늘날 헤이룽장 성 하얼빈시 이란 현 지역인데, 4년 전에 변급 사령관이 지휘한 조선군 1차 출정부대도 통과한 곳이다. 일란에 상륙하여 각종 장비와 군량 등을 모두 배에서 내리고, 쑹화 강의 상류 지역인 하얼빈 쪽에서 새로 건조한 큰 선박 50척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분산 배치되었던 조선 조총수도 이 무렵 원래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조선군 출정부대가 다시 모이자 신류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무단 강이 쑹화 강에 합류되면서부터 강폭은 마치 바다와 같이 넓어지고, 주변에는 너른 평원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불현 듯 고향 생각이 간절해진 신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어디 사령관만 고향 생각이 났겠는가, 군사들도 점점 고조되는 전쟁 공포심과 멀리 떠나온 고국의 가족들 생각하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군과 청군은 쑹화 강 상류에서 새로 건조한 전선 50여 척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휴식과 훈련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500여 킬로미터의 낯선 땅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에 비하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16일 신류는 사르후다의 초청을 받고 그의 막사로 가서 쑹화 강에서 잡은 초대형 물고기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여유도 가졌다.

쑹화 강 일몰 풍경

5월 17일과 18일 그리고 21일까지 세 차례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청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른 것인데 러시아 원정대와의 접전을 앞두고 조선군 포수의 사격 실력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17일에 40명이 표적을 명중시키고, 18일에는 각각 1발씩 사격하여 65명이 명중시켰다. 그러나 표적의 규격이나 사거리 등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21일자 일기에 표적의 규격에 관해서는 여전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표적과 60보 떨어진 거리에서 시험 사격을 한 것으로 보면 며칠 동안 동일한 상황에서 사격을 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1보를 120센티미터로 계산해 보면 60보는 72미터가 된다. 약 7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임시 표적을 만들어서 사격 연습을 한 셈이다.

청군 조총수들도 조선군과 동일한 사격장에서 사격실력을 겨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닝구타에서 참전한 청군 조총수 100명은 거의 절반 정도가 표적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조선군도 100명을 선발하여 사격한 것으로 추정하면 조선군 조총수에 비해 명중률이 낮았다. 18일에는 65%로 전날 40%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발휘했다. 5월 21일에는 60보 떨어진 곳에 표적을 세우고 각각 3발씩 사격하여 좌초(左哨) 100명 가운데 67명이 표적에 명중시켰다. 그중에서 3회 명중이 3명, 2회 명중은 8명이었다. 그리고 우초(右哨) 100명 가운데 56명이 명중시키고, 그중에서 3회 명중은 2명, 2회 명중이 13명이었다. 따라서 전체 조총수의 평군 명중률은 61.5%가 된다.

조선군은 청군 측에 사격 실력을 과시함으로써 푸짐한 부상을 받았다. 17일에 청군 측에서 보내온 소 두 마리를 잡아 회식하고, 19일에도 소 1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우수한 사격 실력에 대한 기대와 결과에 대한 보답이었다. 연일 쇠고기로 회식을 하는 등 5월 초에 회령을 떠난 이후 비로소 훈련과 휴식을 병행함으로써 실전을 앞두고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크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군의 사격 실력을 목격한 청군 지휘부도 조선군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류는 닝구타에서 동원된 청군 조총수의 사격 실력을 보고 아예 절반 정도가 사격술이 생소한 군사들인 것으로 단정했다. 겨우 과녁에 맞히는 군사가 약간 있을 정도로 형평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신유가 파악하기로는 북경과 닝구타에서 참전한 조총수가 수백 명이라고 하지만, 사격 실력이 시원찮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에 비해 월등한 사격 실력을 갖춘 조선 군사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조총의 모양도 조선 향조총이나 왜조총과 달라서 신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청군은 소문에 적들이 “대두인(大頭人)들이 매우 두렵다”고 한 그 머리 큰 사람들이 전립(戰笠)을 쓴 조선군 조총수를 일컫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조선군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을 것이다. 변급이 지휘한 1차 출병 부대가 활약한 이후로 조선 군사들은 ‘대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소문이 펴져서 러시아 원정대도 다시 조선 조총수가 출병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사격 훈련을 하던 21일 총열(銃裂)이 터져 갈라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원에서 참전한 조총수 22명 중에 박사길(朴士吉)이 왼팔에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조선군에는 군의관이나 비상용 의약품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류는 일기에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청군 진영에도 의료 전문 인력이 출동부대에 편성되지 않았는지 사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23일자 일기에 따르면 신류는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로부터 진중에서 모피를 매매하지 말라는 전달을 받았다. 조선군 진중에서 이 지방 특산품인 모피를 거래한 의혹이 있어서 지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청군 진영에서 현지인들과 모피를 거래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거나,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지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15일부터 10일 동안 한 곳에서 주둔하게 되면서 현지인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여 물물교환하는 사례가 발생할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청군 사령관으로부터 조선군 탄약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탄약 운반선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전투를 앞두고 탄약을 빌려야 하는 청군의 준비태세는 한심했다. 조선군은 닝구타 소속 조총수 100여 명에게 각각 4발씩 사격할 수 있는 400여 발을 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출정할 때 조선군 200명은 각자 탄약을 100발씩 지급받았고, 이동하는 동안 유사시에 사용할 20발을 예비로 휴대하고 왔다. (《조선의 대외정벌》394~403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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