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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3】 제2차 나선 정벌-헤이룽 강으로 출동하다(2-2)

by 히스토리오브 202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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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벌군의 속사정

조선군과 청군은 전선을 기다리면서 인근지역 주민들로부터 러시아 원정대의 움직임에 관한 첩보를 몇 차례 입수했다. 일란에 도착하기 직전인 14일 청군 지휘부는 러시아 전선들이 헤이룽 강 하구에 집결한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25일에는 러시아 전선 11척이 먼저 헤이룽 강 하구에 도착한 가운데 그 뒤를 따라 다른 11척이 계속해서 항진하고 있다는 첩보를 추가로 입수했다.

조.청 연합군 수상 이동로(구글 지도 참조)

이 같은 첩보를 제공한 주민들은 앞서 러시아 원정대에 부역(附逆)했다가 조선군과 청군 대부대가 진출하자 후환이 두려워서 다시 청군 쪽으로 돌아선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제공한 첩보를 액면대로 믿을 수만은 없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로 정찰선 1척과 육로(陸路) 정찰 기병을 파견했다. 5월 27일에 돌아온 육로 정찰 기병 2명은 적선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앞서 주민들이 전해온 소문과 사뭇 달랐다. 실제로 현지 주민들의 성향을 신뢰할 수 없어서 출입을 통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청군 지휘부도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 무렵 조선군 조총수들이 화약 폭발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일이 생겨났다. 부령에서 참전한 조총수 김우일(金友一)이 28일 잠시 내린 소나기에 젖은 화약을 밥 짓는 불에 말리다가 폭발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김우일은 한쪽 다리에 중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맬 정도로 위중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설상가상으로 회령 조총수 강응방은 부스럼 병이 악화되어 위독한 상황에 이르렀다. 앞서 회령 부사 민진익은 피부병 환자인 강응방의 하소연을 묵살하고 강제로 참전시켰다. 비위생적인 야영 생활이 장기화하자 피부병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신류는 강응방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강제로 출전시킨 회령 부사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소한 작전 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맨몸으로 이겨내야 하는 악조건에 환자를 출전시킨 것은 지휘관의 책임이 크다. 출병에 앞서 철저한 신체검사로 환자를 선별해내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신류의 작전에 차질을 초래하려는 고의성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행위였다.

회령 부사 민진익은 남한산성이 포위당했을 때 인조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근왕군에게 왕명을 전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출성을 감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으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선전관이었던 민진익은 1637년 1월 4일 남한산성에서 몰래 출성하다가 청군에게 발각되어 화살을 맞고 들어오는 등 수차례 출성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충청도에 왕명을 전달하고 복귀하자 인조로부터 “담력이 있어 가히 쓸 만하다.”는 칭찬을 듣고 칼을 선물로 받았다. 벼슬도 통정대부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와 같이 인조의 신임을 받은 민진익은 승진을 거듭하여 충청 수사에 이르렀으나 황해 병사로 근무하던 중 비리 혐의로 해직되었다. 얼마 후 장단 부사로 복직되었다가 다시 회령 부사로 부임하자 신류의 2차 출병에 파견할 조총수를 선발했던 것이다.

남한산성 농성 상황(1637.1.1~1.25), 《병자호란사》 171쪽(유재성,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5월 중순에 쑹화 강 중류의 일란에 도착한 후로 5월 말까지 약 보름 동안 상류지역에서 만들고 있는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동안 날씨가 무척 가물어 몇 차례 내린 소낙비를 제외하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강물의 수량이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상류지역에 강물이 줄어들어 항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비교적 수량이 풍부한 하류지역의 선박 운행도 순조롭지 않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에 강풍이 불어서 들판의 초목들이 모두 말라죽는 등, 계속되는 이상 기후로 작전 지역의 환경이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2일 전선이 도착했다. 최고 지휘부가 승선할 조선 판옥선과 유사한 대선 4척을 비롯해 대중선(大中船) 36척, 중소선(中小船) 12척으로 총 52척이었다. 중소형 화포 50문을 나누어 장착하고 포수 100명을 분승하여 운용하도록 배치했다. 이 선박들은 전년 8월부터 그해 4월까지 9개월 동안 한족(漢族) 600여 명이 투입되어 건조한 것인데, 선박을 운용하는 일도 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만주족, 현 만족)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해상 및 수상전에 익숙한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 위키

이렇게 도중에 증원되면서 총 병력은 2,000여 명을 약간 상회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조선의 대외정벌》403~406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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