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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지역 이동
청나라에서 건조한 전선이 도착한 이튿날인 6월 3일부터 본격적인 출동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조선군은 40일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을 청군에게 빌려 보충했다. 출발 당시에 휴대한 3개월치 가운데 이미 1개월분을 소모한 상황이라 유사시에 대비하여 취한 조치였던 것이다. 1차 출병 때는 물론 2차 출병 이후로 처음 지원 받은 군량이었다. 그러나 무상 지원이 아니기 때문에 되로 빌린 군량을 말로 갚아야 하는 고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작전에 돌입하기에 앞서 실태를 점검하였는데 전투에 참가하기 곤란한 환자 등을 선별하여 귀국시켰다. 비에 젖은 화약을 말리다가 폭발 사고를 당해 화상을 입은 김우일과 피부병이 악화된 강응방을 귀국자로 분류했다. 그 밖에 적재량이 초과하여 승선할 수 없는 수솔(隨率) 3명도 이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조선군은 최초 출발 당시 마부 39명을 제외한 265명 가운데 5명이 줄어든 260명이 실제 작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머지 198명의 조총수들은 25명을 단위로 나뉘어 8개 부대에 배속되었고, 이들은 다시 전선 1척마다 5명씩 분산 탑승했다. 청군의 경우도 조총수 5명과 일반 군사 25명이 승선했다.
선단의 구성은 좌초관(左哨官) 박세웅과 대통관 김대헌(金大憲, 金大獻)이 탑승한 전선이 선봉으로 편성되고, 우초관 신성일과 대통관 이몽선(李夢先)이 탑승한 전함이 후영(後營)으로 배치되었다. 김대헌은 1654년(효종 5) 7월 조선에 입국하여 동대문 밖에 살고 있던 김윤선(金允善)을 만나려고 한 사실이 있다. 그가 김윤선을 자신의 처삼촌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대헌의 처는 조선 여인이 분명하다. 김대헌 역시 조선 사람일 개연성이 높으나 자료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조선군 사령관 신류(申瀏)가 탑승한 전선과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의 지휘용 전선은 후영에 편성되었다. 이들은 6월 4일 저녁 무렵에 승선을 완료한 후 5일 새벽에 출항했다. 순풍을 타고 쑹화 강 하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항진하여 당일 오후 미시(未時,오후 1시∼3시) 경에 야크샤 가싼(藥沙家善)에 도착하여 야영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러한 대규모 군사와 장비가 육로로 이동한다면 8일 정도가 소요될 장거리인데, 오늘날 헤이룽장 성 푸진(富錦) 시 부근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육로가 아닌 선박을 이용했기 때문에 불과 한나절 동안 항진하여 도착한 것이다.
조선군, 러시아 원정대와 맞붙다
조선군과 청군이 탑승한 전선들은 8일에 다시 하류로 내려와 레파 가싼(列伐家善)이라는 강변 마을에서 머물렀다. 이곳은 사령관 사르후다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는 닝구타 암반장진으로 부임한 지 7년이 경과하는 동안 금의환향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고향에서 보낸 짧은 날들을 뒤로 한 채 10일 아침 일찍부터 출발하여 헤이룽 강 하구를 지나 20여 리를 더 내려갔다.
그곳에서 마침내 헤이룽 강 한복판에 닻을 내린 채 통행을 차단하고 있는 러시아 원정대 선박 11척과 조우했다. 이들은 헤이룽 강 상류로부터 항해해 온 이후, 하류 지역에서 접전하게 된 것이다.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원정대 선박을 포착하자 기선을 제압하려고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조선군이나 청군을 막론하고 수군으로서 체계적인 수상전투 훈련을 받은 군사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단의 공격 대형도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 원정대는 조선군과 청군의 저돌적인 행동에 위협을 느꼈는지 정면 대응을 회피하고 뱃머리를 돌려 하류 지역으로 10여 리를 물러갔다. 화약무기의 사거리에서 벗어나서 전력의 열세를 보강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서 인근에 정박하고 있던 다른 선박들과 합류하여 전력을 강화한 후에는 공격대형으로 전환해, 상류지역에서 편서풍을 타고 내려오는 조선군과 청군의 선단을 맞아 일전을 겨룰 전투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군과 청군의 작전은 비교적 단조로웠다. 전위(前衛)가 앞장서고 청군 지휘부와 주력군이 중군(中軍)으로 중앙에 배치되었으며 후위(後衛)는 신류가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위부대는 빠른 속도로 러시아 원정대 선박에 접근하면서 일제히 대포를 발사했다. 화약무기의 유효사거리를 감안하여 근접한 것이 분명했다. 이에 러시아 원정대 선박도 곧 바로 대응사격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군과 청군이 일제 사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면서부터 러시아 원정대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각종 화약무기와 궁시(弓矢) 사격으로 집중 공격을 가하자 러시아 원정대는 대응 사격을 포기했다. 배 안으로 몸을 숨기거나 아예 강변에 상륙하여 배를 버리고 숲 속으로 도망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원정대의 선박을 쇠갈고리로 끌어당겨 놓고 옮겨 탔다. 이는 근해에서 접전하는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법인데, 특히 명천(明川) 지역에서 참전한 포수들이 용감한 행동으로 전투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들과 함께 승선한 청군도 선박에 뛰어들더니 곧바로 불을 질러 태워버릴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가 저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소각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강변에 상륙한 후 숲 속으로 도주한 러시아 원정대와 접전은 계속되었다.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러시아 원정대를 향해 사격을 집중하자 쌍방 간에 한바탕 접전이 벌어지고, 양측에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러시아 선박에 옮겨 탔던 군사들이 되돌아오려고 할 때 선실에 숨어있던 러시아 원정대 군사들이 갑자기 뛰쳐나와 사격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더 많이 났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조총수 7명이 현장에서 전사했다. 청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는 손실을 입었다. 앞서 사르후다가 화공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 원정대는 전멸했을 것이고 조선군과 청군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령관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무리한 지시를 내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르후다가 비로소 불화살을 발사하여 적선을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불리해지면서 마지못해 소각 명령을 내린 것이다. 서풍을 타고 날아간 불화살이 삽시간에 러시아 원정대 선박 7척을 모두 불태웠다.
조선군 조총수가 적선으로 옮겨 탄 후 비어 있던 배가 탈취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앞서 육지로 달아났던 러시아 원정 대원들이 몰래 돌아와 빈 배를 나포한 후 강변을 따라 상류로 끌고 간 것이다. 상류로 거슬러 오르느라고 속도가 완만했다. 후영을 지휘하던 신류의 선박이 앞장선 가운데 여러 선박들이 일제히 추격했다. 러시아군은 끌고 가던 배를 버리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배 안에서 육지로 탈출하지 못한 러시아군 40여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이 무렵 이미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3척이 닻을 내리고 러시아 선박 4척을 감시하는 가운데, 나머지 전선은 헤이룽 강 연안에 집결하여 밤을 새웠다. 그사이 러시아 원정대 패잔병들이 어둠을 틈타 선박 한 척에 옮겨 탄 후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결국 3척을 노획한 셈이다. 당시 배 안에 억류되었던 와르카 지역 여자들 100여 명은 구출되었으나, 러시아 원정대 군사들은 선박 안에서 불타 죽거나 강변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6월 10일에 벌어진 헤이룽 강 전투에서 조선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7명·중상 15명·경상 11명으로 집계되었다. 그중 중상을 입었던 이충인(李忠仁)이 12일 사망해 중상자는 14명으로 줄고 전사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신류는 청군 전사자를 60∼70명인 것으로 추정했다.
《제2차 정벌군의 피해 상황》
구 분 | 명 단 |
전 사 자 (8명) |
회령:정계룡(鄭季龍) 길주:윤계인(尹戒仁)·김대충(金大忠) 부령:김사림(金士林) 종성:배명장(裵命長)·유복(劉卜) 온성:이응생(李應生)·이충인(李忠仁) |
중 상 자 (14명) |
회령:서계수(徐戒守)·박춘립(朴春立)·이두남(李斗男)·정보원(鄭甫元) 길주:박막생(朴莫生)·박승운(朴承云)·박승길(朴承吉) 부령:노비 충성(忠成)·정중립(鄭仲立) 종성:박희린(朴希獜) 경흥:남사한(南士漢)·김대일(金大一) 경성:나잇동(羅芿叱同) 명천:김계승(金戒承) |
경 상 자 (11명) |
회령:김일남(金一男)·전사남(全士男)·정옥길(鄭玉吉) 길주:장솟지(張小叱知)·장승립(張承立)·김옥지지(金玉只之)·양득앵(梁得鸎)·박기련(朴己連) 부령:노비 애충(愛忠) 종성:신경민(申景民)·박소봉(朴所奉) |
한편 러시아 원정대의 피해는 더욱 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선박 11척 중에서 10척을 빼앗기고 겨우 한 1척이 탈출하는데 그쳤다. 선박에 싣고 있던 많은 무기와 군량 및 군수품을 잃어버리고 인명 피해도 컸다. 당시 러시아 원정대의 총원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투가 끝난 후에 공개된 피해 상황을 역산해보면 총 5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전장에서 무사히 탈출한 러시아 원정대는 겨우 95명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원정대의 선박에 관해 조선군 사령관 신류는 감탄할 정도로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다고 기술했다. 예컨대 갑판 위에 2중, 3중으로 두꺼운 판옥을 덮어서 홍이포(紅夷砲)로 공격해도 파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홍이포는 1631년(인조 9)에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에 의해 소개된 서양의 화약무기다. 정두원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육약한(陸若漢)으로 불리는 서양 신부 로드리게스(Johannes Rodriguez)로부터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염초화(焰硝花)·자목화(紫木花) 등을 선물로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천리경은 천문을 관측하고 100리 밖의 적군을 탐지할 수 있으며, 수석식 소총으로 추정되는 서포는 화승(火繩)을 사용하지 않고 돌멩이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났다고 한다. 홍이포 운용 지짐서로 보이는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이라는 책도 함께 들여왔다.
인조(仁祖)는 정두원이 서양 화포를 가지고 귀국한 점을 높이 평가했는데, 반입된 이후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서양 홍이포의 위력에 관해 신류가 일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러시아 원정대와 끝까지 싸우면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그는 이번 싸움의 승패가 무기의 우열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운세에 달린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많은 변수가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튿날 11일에는 전투가 소강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조선군도 청군과 함께 전장을 정리하면서 돌발 상황에 대비하는 여유를 찾았다. 그런데 청군 사령관으로부터 조선군 전사자의 시신을 화장하라는 지시가 전달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노획한 러시아 선박 한 척에 조선군 전사자들의 시신을 싣고 함께 불태워버리라는 지시였다. 조선에서는 화장 풍습이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분노를 억누른 채 사르후다를 설득하여 사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조선에는 화장하는 풍습이 없으며, 더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장렬히 전사한 전우들을 고국으로 운구하지는 못할망정 결코 화장할 수는 없다고 맞섰다. 이 같은 논리로 사루후다를 설득한 결과 화장하지 않고 안장하게 되었다.
신류는 전사자들을 헤이룽 강 남안의 양지바른 언덕에 같은 고향 전우들끼리 함께 묻어주었다. 이튿날 12일 또 한 명의 전우를 잃었다. 중상을 입었으나 아무런 치료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행만 기다리던 이충인이 결국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온성에서 함께 참전한 전우들과 묻혔다.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의 속내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는가 화공(火攻)을 실시하지 못하도록 저지했던 것은 러시아 원정대 선박 안에 실려 있는 전리품이 탐났기 때문이다. 조선군과 청군의 전사자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결국 사르후다는 수많은 군사들의 목숨과 바꾼 러시아제 전리품들을 욕심껏 챙겼다.
조선군은 러시아제 신형 소총을 노획했는데 화승총에 비해 성능이 개량된 수석식 소총으로 짐작된다. 조총은 강풍이 불거나 비가 오는 악천후에는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화약과 탄환을 총구에 다져넣고 불 심지인 화승(火繩)으로 화약에 점화하여 탄환을 발사하는 원리라서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석식 소총은 화승식인 조총에 비해 사용하기 편리하여 발사속도가 빠르고, 날씨의 영향도 훨씬 적게 받는 장점이 있다. 총구를 통해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는 방식은 조총과 다를 바 없으나 부싯돌의 원리로 화약에 점화하여 탄환을 발사하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앞서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서양 화포와 유사하거나 한층 발전한 소총이었을 것이다. 이에 신류 사령관도 개선할 때 전리품으로 가져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청군에게 다시 빼앗기면서 마찰을 빚게 되었다. 40여 년 전 1619년 조선군이 명군의 요청으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군대와 싸울 때 갑자기 전세가 역전된 사례가 있었다. 느닷없이 불어 닥친 모래폭풍으로 화약 장전이 불가능하고 화승의 불씨도 꺼져버렸기 때문에 그 틈에 밀어 닥친 기병의 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이로 인해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지휘하던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6월 12일까지 현장에 주둔하면서 러시아 원정대 군사 10여 명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헤이룽 강 북안에 군사들을 상륙시켜 인근 숲 속을 샅샅이 수색해 전사한 러시아 원정대 군사들의 시체를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러시아 원정대의 저항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작전을 종료하고 13일에는 쑹화 강이 합류하는 어귀로 되돌아와서 휴식에 들어갔다.
조선군이 지원부대로 출병한 헤이룽 강 전투는 조선군과 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신류는 러시아 원정대의 우세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돌렸다. 그만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전투였다는 뜻일 것이다. 신류가 추정한 청군 전사자 60〜70명의 규모는 결코 적은 피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청군이 승리를 자축한 것은 앞서 세 차례 충돌 과정에서 청군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조선의 대외정벌》406~416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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