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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정 악화와 변방 안정 대책
비록 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 나선정벌은 당시 북벌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국왕 효종이 실전을 통해 조선군의 전투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적극적인 북벌 준비가 없었더라면 출병 요청을 거절할 구실이 생겼을 것이며, 현실성 부족한 북벌정책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 것이라는 최근 연구자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군 출병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만주 지역으로 들어간 후에 사간원(司諫院)에서는 변방 지역 주민의 생활안정과 국방력 강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다. 제1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제2차 출정 역시 함경도에서 추진된 실정을 감안하여 함경도 지역 주민의 생활 안정과 방위력 증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함경도가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일 뿐 아니라 토지마저 척박하여 주민들의 생활이 매우 궁핍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그랬기에 조정에서는 가끔 중신들을 파견하여 주민들의 애로 사항을 개선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위무하기도 했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대한 중앙 조정의 대책은 미흡하여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다. 결국 주민들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흩어졌고, 육진의 변방에는 민가를 발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갔으며, 유사시 변경 지역을 방위하는 데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간원의 건의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무렵 조선은 가뭄이 겹치면서 경제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삼남(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소속된 수군과 육군의 훈련을 일시 중단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기도 했다.
효종이 중앙군의 주력인 훈련도감 조총수 1,000여 명을 증원하여 군비를 강화하려고 한 계획 역시 강력한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사헌부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은 “팔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죽어가게 되었으니 항상 급식하는 자에게도 절감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할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농사를 망친 곳이 많아 세금 징수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군사를 증원한다면 그에 따른 유지비를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주장에 군무를 전담하는 비변사도 동조하면서 군사를 증원하는 계획을 가을로 연기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효종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증원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다.
이처럼 경제 여건이 매우 어려웠던 까닭에 신류가 지휘했던 제2차 출병부대의 전사자와 부상병에 대한 보상도 지연되었다. 출정부대가 복귀한 이듬해인 1659년에 보상이 실시되었는데 전사자 8명의 유족에게는 각각 은 30냥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위로했다. 부상자의 경우는 5개 등급으로 구분하여 각각 보상금을 지급하고 공로를 현양했다. 그 기준은 앞서 청군이 나선정벌 전투 직후인 1658년 6월 16일 청 정부에 보고했던 1등부터 5등까지 나눈 등급에 근거하여 분류한 것이다.
《조선군 2차 나선정벌군 전사상자 보상 계획》
구 분 | 병 력 수 | 보 상 액 | |
전사자 | 8명 | 각 30냥 | |
부상병 | 1등 | 6명 | 각 10냥 |
2등 | 3명 | 각 8냥 | |
3등 | 6명 | 각 7냥 | |
4등 | 7명 | 각 6냥 | |
5등 | 3명 | 각 5냥 |
또 하나의 위대한 기록 유산 :《북정록》
북병사 신류는 자신이 지휘한 조선의 2차 나선 정벌 과정을 기술한 ‘출정일기(出征日記)’를 후세에 남겼다. 1658년(효종 9) 4월부터 8월까지 총138일간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기록물은 《북정록》 또는 《북정일기》(신류 자신이 특정한 제목을 붙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로 불리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일기의 처음에 “행중기사는 무술년 4월부터 시작하다(行中記事 戊戌四月爲始)”로 서술되고 있으나 4월 1일부터 기록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기를 작성한 일자는 4월 6일인데, 그날그날의 기후 상태를 먼저 기록하고 이어서 기사를 쓰는 형식이다. 조선군이 출병하게 된 배경을 간단히 기술하고, 이어서 지역별로 선발한 병력 수 등 부대 편성과 관련한 내용을 기술하여 총 304명이 선발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월 일기는 6일부터 30일까지 25일 간 기록했는데, 24일자가 누락되었으나 출병군 사령관에 선임된 후 회령부와 행영을 오가면서 출정을 준비하는 과정을 적었다. 조선군의 길 안내를 담당할 청군 통역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군관 박대영과 통역관 김명길의 전입신고를 받고 사격 훈련을 실시한 내용이 중심이며, 대부분은 ‘맑다’ 등과 같이 그날의 기후에 관한 내용을 간단히 적었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일기는 청나라 통역관이 도착하고, 두만강 도하에 대비하여 군량을 강 건너로 수송하는 사실을 기록한 4월 30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5월 1일부터 군사들이 두만강을 도하하고, 2일부터는 출정부대가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기록했는데, 9일 닝구타 성채에 도착한 이후에는 청군과 관련된 기록이 중심이 되면서 일기의 분량도 4월과 달리 크게 증가한 특징이 있다.
이어서 5월 11일부터 선박을 이용하여 무단 강 하류로 내려가다가 15일 쑹화 강과 합류하는 일란(삼성)에 도착한 내용과, 30일까지 대기하면서 조선군과 청군이 체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청군과 함께 조총 사격을 실시하여 우열을 겨룬 일, 현지 주민들과의 관계, 청군의 정보 및 첩보 수집 활동 등에 관해 썼다. 대부분 “송가라강 어귀에 머물렀다(留松加羅江口)”로 시작하는 일기는 6월 4일까지 계속된다. 쑹화 강 상류에서 선박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20여 일 동안 쑹화 강 초입에서 주둔한 것을 알 수 있다.
일기에 따르면 조선군과 청군은 6월 5일부터 송가라강(쑹화 강) 어귀를 출항해서 하류로 내려갔다. 순풍을 타고 갔기 때문에 육로로 가면 8일이 걸릴 거리를 불과 몇 시간 만에 주파해 약사가선(아크샤 가싼)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9일 열벌가선(레파 가싼)에서 숙영하고 이튿날 아침에 선박을 타고 헤이룽 강 하구로 내려가 러시아 원정대의 선박과 조우했으며, 6월 10일부터 전투에 돌입했다. 조선을 떠나온 지 2개월여 만에 헤이룽 강 하구에서 비로소 적과 맞닥뜨린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6월 10일 일기의 분량은 두 차례 전투 내용을 기록한 관계로 크게 증가했다. 이날 중상을 입은 15명과 경상을 입은 11명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했는데, 중상자 중에는 노비 신분으로 참전한 충성(忠成)과 경상을 입은 노비 애충(愛忠)도 차별 없이 기록하여 공로를 표시한 것이 특징적이다. 6월 11일과 12일의 일기는 전투가 끝난 후에 전장을 정리하는 내용이다. 최초 7명의 전사자를 동향별로 구분하여 매장해주고 이튿날 중상자 중에서 숨을 거둔 1명을 추가로 매장한 사실을 기록했다. 특히 12일 일기에는 러시아 원정대의 선박과 병기 등에 관해 무인으로서의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군과 청군이 헤이룽 강 입구로 되돌아와서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3일부터다. 14일 일기는 동풍을 만나 쑹화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러시아의 위치에 관해 기술했다. 러시아 원정대가 헤이룽 강 상류 쪽에서 내려왔다고는 하나 그쪽에는 몽골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 지역은 아닐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헤이룽 강은 백두산이 아닌 몽골 지방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가 정벌작전에 참가함으로써 알게 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6월 20일까지는 주로 서풍과 수량 부족으로 인해 선박 이동이 원활하지 못한 실정을, 21일부터 동풍을 만나 빠르게 이동했고, 24일 무단 강과 쑹화 강이 합류하는 일란 지역에 도착한 사실을 기록했다. 25일 이후는 대통관 이몽선으로부터 조선군의 귀국이 연기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아연실색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 다양한 활동이 일기의 중심 내용이 된다. 29일 일기에는 조선군을 현지에 장기 체류시키는 문제로 청군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설전을 벌인 사실을 자세히 기록했다.
6월 29일부터는 ‘신응기 가선(兟應基家善)’ 또는 ‘서응기 가선(鋤應基家善)’이라는 곳에 계속해서 주둔하면서 일기를 썼다. 7월 3일에도 청군 지휘부가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와 그들의 속셈을 분석했고, 6일에는 조선군이 잔류하는 경우에 발생할 군량 수급 문제 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청군 사령관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신류는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를 설득하여 당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조선군의 체류는 군량 수송 문제와 직결되고 유난히 겨울이 빨리 시작되는 현지 기후와도 직결되므로 전권을 행사하는 청군 사령관을 설득하는 방안을 선택한 것이다. 이 같은 사안은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기에 집중 기록된다. 조선군 철수와 관련하여 희망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은 7월 21일이다. 6월 29일 주둔한 이후로 7월 23일 출발하여 이튿날 선소(船所)로 이동하기까지 무려 23일 동안 ‘서응기 가선’이라는 곳에 머문 셈이다.
선소에는 8월 4일 출발하기까지 10일 동안 주둔하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러시아 원정대의 신무기인 소총을 획득하려는 활동이 주목된다. 그는 군인으로서 처음 보는 러시아제 신형 소총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청군 사령관이 보낸 러시아제 소총 1정을 수령하는 사실은 7월 28일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후로 조선군이 다시 닝구타로 돌아온 것은 8월 13일인데, 7일자 일기가 누락되고 전후 수일 동안 날씨에 관한 기록만 보인다. 조선군은 18일 닝구타로 떠나면서 비로소 청군 사령관의 지휘에서 벗어났다. 이때부터 함경도 행영에 도착하는 8월 27일까지는 출병할 때와 동일한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출병할 때와 마찬가지로 개선할 때도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고 25일에는 진눈개비가 내릴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26일 두만강에 도착했으나 강물이 불어나 있어서 한꺼번에 도하하지 못하고 제1진이 먼저 건넜다. 이튿날 아침에 도하하던 제2진은 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 각종 장비를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는데, 러시아제 소총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일기는 8월 27일자로 끝난다. 말미에 “출병 중에 듣고 본 것을 간략히 적다(行中略記聞見)”라는 별도 제목으로 만주 지역의 인물, 풍속 등에 대해 간단히 추가했다. 신류가 총138일간 작성한 《북정록》은 이로써 끝을 맺는다.
좌절된 러시아의 ‘남진정책’
러시아는 1581년(선조 14, 명 신종 만력 9)에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대가 최초로 우랄 산맥을 넘은 이후로 적극적인 ‘동진정책’을 추진했다. 1652년 1658년, 조선군이 지원하는 청군의 공격 앞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러시아 원정대는 큰 타격을 입었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러시아는 좌절을 겪게 되었다.
1660년(조선 현종 1, 청세조 순치 17)대 후반부터 러시아 원정대가 다시 진출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헤이룽 강 상류 지역인 알바진 일대로 국한되었고, 러시아는 헤이룽 강 중하류 서남 지역에 대한 청의 지배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1683년(조선 숙종 9, 청 성조 강희 22)에 제야 강과 알바진 일대에서 무력충돌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약 4반세기 동안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지배권은 안정적으로 확보되었다.
‘북벌’이라는 이상과 ‘조선’이라는 현실
효종에게 나선정벌은 ‘북벌’의 간접적인 시험 무대이기도 했을 것이다. 2차에 걸친 나선정벌 작전에서 조선군은 조총수를 파병하여 실전 경험을 축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청국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나 자신들의 전력 수준을 조선에 노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나라가 조선에 조총수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조선군의 우수성을 인정한 것일 뿐 아니라 청군 조총수가 조선군에 비해 취약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제2차 출정에서는 청군의 사격술이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컸으며, 1659년 효종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북벌정책은 폐기되었다. (《조선의 대외정벌》430~438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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