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군의 귀국 보류 지시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작전 지역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1658년 6월 14일 날씨는 흐렸으나 동풍이 세차게 불어 쉽사리 쑹화 강 상류로 항진할 수 있었다. 15일에는 날씨가 화창하고 바람마저 잠잠했으나 상류로 갈수록 수량도 적어서 매우 느리게 항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청군 지휘부는 전투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16일에 북경의 중앙 정부로 발송했다. 이때 조선군의 인명 피해 상황을 전사자 8명과 부상자 25명으로 기록했는데, 청군과 차별하지 않고 1등부터 5등까지 다섯 단계로 세분하여 보고했다. 이날 보고서에서 청군의 인명 피해 상황도 처음 알려졌다. 육군 80여 명과 수군 3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에 러시아 원정대는 사령관 스테파노프를 비롯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227명이 겨우 전장을 탈출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쑹화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6월 15일부터는 바람이 잠잠해지고 서풍이 불었기 때문에 운항 속도가 느려졌다. 고향길이 바쁜 조선군에게 하루가 1년 같이 고통스러웠다고 신류는 회고했다. 마침 6월 21일부터 동풍이 불어서 다시 빠른 속도로 항진해 이동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21일 술시(19:00∼21:00) 무렵 함경도 경성의 북병영에서 보내온 공문 2통이 신류에게 전달되었다. 5월 24일자와 6월 2일자로 발송한 문서인데, 원활한 군량 보급을 위해 귀국 일정과 영고탑(닝구타)의 현지 곡물 가격 등을 질의하는 내용이었다. 신류는 이미 귀국할 예정이므로 천리 길에 군량을 수송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했다. 사루후다가 통나무 배 1척을 내주면서 답서를 보내도록 배려해 주었다. 통나무 배는 무단 강이 쑹화 강에 합류하는 어귀에 도착한 후에 받기로 했는데 순풍에는 큰 배의 항해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6월 24일에 무단 강이 합류하는 일란(삼성)에 도착했다. 쑹화 강 하구에서 14일에 출발하여 10일 동안 쑹화 강을 거슬러 올라온 셈이다. 이날 청군이 제공한 통나무배 1척을 받았는데, 밤에 목단강 입구로 통나무배를 이동시켰다. 수솔 이환(李還)이 답서를 가지고 경성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다음날 이른 아침, 신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대통관 이몽선과 김대헌 일행이 귀국을 보류하고 일단 일란에 대기하라는 청군 사령관의 지시를 전달한 것이다. 답서를 휴대한 이환은 출발하지 못했고, 신류 사령관은 사르후다의 지시를 전달받은 후 그들과 담판을 벌였다.
대통관:적군이 아직 남아 있으니 조선군은 완전히 철수하지 말고 주둔하다가 8월이나 9월 초에 영고탑(닝구타)으로 복귀하시오. 이 같은 내용으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여 군관 1명을 회령으로 보내 군량을 계속해서 수송해 오도록 하시오.
신 류:적을 만약 격파하지 못해 다시 싸워야 한다면 한 나라의 국력을 기울여 군량을 수송하는 경우가 있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이미 적을 모두 격파하여 다시 대비할 필요가 없는데 뜻밖에도 군량을 수송하라고 하니 북쪽 지방 백성들은 장차 살아갈 길이 없소.
통관은 국가의 고충을 헤아려서 대장에게 좋은 말로 건의해 주시오. 청군이 40일분의 식량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원거리를 수송하는 고통을 면하게 해 준다면 큰 다행일 것이오.
하물며 장마철에 회령과 영고탑 사이의 큰 강을 여러 군데 건너야 하니 식량이 빗물에 젖에 반드시 썩게 될 것이오. 백성들의 노력한 결실만 낭비하고 결국에는 허사가 될 것인데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소.
대통관:이번 일은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이미 결정한 일이오. 계속해서 군량을 보급하는 문제는 황제의 명령이오. 귀관의 요청을 주선할 수는 없으니 빨리 시행하도록 하시오.
장거리 원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던 조선군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마철 진흙탕 길에 무거운 군량을 강과 하천을 가로질러 닝구타까지 운반하는 문제는 더욱 난감한 것이었다. 신류는 더 이상 이들과 시비하지 않고 사르후다 요구사항을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군관 박대영을 이날 밤 출발시켰다.
이 무렵 닝구타에 와 있던 조선인 통사가 조선군이 개선한다는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 이미 출발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군관 박대영이 회령에 도착하여 조선군의 귀국이 연기된 사실과 다시 군량을 수송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달해야 비로소 군량 수송 작전이 다시 시작될 터였다. 이로 인해 그동안 시일이 지체되어 군량 조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또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한편 조선군 출병부대를 계속해서 주둔시키려는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의 계획이 부사령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북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사령관은 닝구타 군사로도 전함을 관리할 수 있는데 멀리서 온 조선군을 적을 물리친 후에도 부당하게 잡아둘 수 없으며, 군량을 다시 수송하라는 요구도 무리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군사들이 여름옷을 입고 왔기 때문에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북쪽 지방에서 얼어 죽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조선군을 조속히 귀국시킬 것을 주장한 부사령관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선양 암반장진 둔바이(敦拜)가 부사령관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부사령관은 북경에서 파견된 인물이므로 둔바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적어도 사령관의 부당한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여 관철시키는 힘을 가진 중앙정부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부사령관은 사령관이 전리품에 눈이 어두워 처음부터 화공을 실시하지 않아서 적선을 놓친 작전상의 실수를 약점으로 잡았다. 장차 러시아 세력이 다시 쳐들어오면 무슨 염치로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북경에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압박했다.
신류는 주둔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군량 수송에 따르는 문제점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그래서 7월 6일에는 조선 통역관 김명길을 사르후다의 최측근인 애사마(艾士麻)에게 보내 조선군의 입장을 전달하도록 했다.
‘우리는 비록 가을이 가고 한 해가 바뀌도록 주둔한다 해도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나 오직 군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걱정일 뿐입니다. 회령에서 영고탑까지 쌀 한 바리 운임이 20섬이니 50일치 군량 약 300섬을 수송하려면 운임만 5,000섬이나 될 것이다.
회령과 영고탑 사이는 보통 8~9일이 걸리는 거리인데 도로는 험준하고 날마다 큰 하천을 건너야 하며, 더욱이 지금은 장마철이라 곡식이 비에 젖어 상하기 쉬워 결국은 영고탑에 도착하기도 전에 썩어서 먹을 수 없을 것이니 백성의 노고를 탕진한 결과가 허사로 돌아가게 될 것인즉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지금 만약 청국에서 준 40일 분량의 곡식을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조선에서 수송해 오는 고통을 덜게 해 준다면 크게 다행일 것이다.’
애사마는 사령관 사르후다에게 전달하고 돌아와서는 그가 보인 반응을 전했다. 당시 사르후다는 잘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할 뿐이었다. 오히려 애사마가 조선군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서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청군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동맹국 군사에 대한 대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실하고 야박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조선군 사령관 신류의 위상은 청군 사령관과 대등하지는 않더라도 서로 대면하여 작전을 논의하거나 건의하는 수준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고, 조선 통역관을 이용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청국에 귀화한 것으로 보이는 대통관 이몽선 들을 통해 겨우 입장을 전달하거나 작전 명령과 지시 사항을 전달받는 정도였다. 이나마도 통사들이 농간을 부릴 때는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다. 앞서 청군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내린 결정이라는 이유로 조선군의 반대 의사를 전달하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은 통역관의 도리에서 벗어난 오만방자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조선군 사령관이 청군 사령관에게 통역관을 통해서도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소통부재의 폐쇄적 관계가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종료하고 개선하던 조선군이 청군 지휘부의 엉뚱한 결정으로 인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장마철에 무거운 군량을 싣고 수많은 강과 하천을 통과하여 닝구타까지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선의 대외정벌》416~421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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