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1658년(효종 9, 청 세조 순치 15) 3월 초 차사(差使) 이일선(李一先)이 청국 세조의 칙서를 휴대하고 입국했다. 이일선은 전년 3월 말에 입국했던 대통관 이일선(李一善)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효종은 국왕의 일상 집무실인 희정당(熙政堂)에서 맞이했다. 효종은 청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대담을 나누었다.
이일선:대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을 토벌하려는데 군량이 매우 부족합니다. 조선에서 군사적으로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에서 5개월치의 군량을 지원해주십시오.
효 종:적의 형세는 어떠한가?
이일선:적군은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가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군량이 없어서 조선의 곡식을 수송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효 종: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려면 형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지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에 귀화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인 이일선은 비록 신분이 양반이 아닌 중인(中人) 통역관이나 청나라 세조가 파견한 사절이라서 청인 사신과 동일하게 대우할 수밖에 없었다. 이일선은 청이 효종에게 보내는 칙서와 함께 예부(禮部)에서 보내는 공문서도 전달하였다. 약 5개월 동안 작전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비롯한 군수품 일체를 조선에서 준비하도록 요구하는 문서였다. 4년 전의 제1차 출병에 비해 요청한 군사도 두 배로 증가한 200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군수품도 조선측이 전담하도록 요구해 왔다. 조선은 1차 출병 때보다 더 큰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출병 규모를 확대한 이면에는 제1차 정벌 전쟁에서 조선군 조총수의 활약이 러시아 원정대를 몰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실에 고무된 점이 있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요인은 러시아의 원정대가 제1차 정벌 때와는 달리 한층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헤이룽 강으로 진출해 왔으므로 이를 공략하는 데 더 많은 조선군 조총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청국은 제1차 정벌을 단행한 그 이듬해(1655)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원정대와 접전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다. 러시아 원정대가 헤이룽 강 상류의 쿠마르스크(Kumarsk) 요새에서 월동하면서 전력을 보강하자 도통(都統) 밍안달리(明安達禮)가 섣부르게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병(八旗兵) 7,500명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격작전에 동원한 팔기군의 화력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하다가 장기전으로 바뀌어 식량이 부족하자 스스로 포위망을 풀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657년(효종 8, 청 세조 순치 14)에도 쑹화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원정대와 접전을 벌여 청군 3명이 전사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가 크게 긴장한 반면, 러시아는 헤이룽 강 일대에서 영향력을 확산하는 계기를 얻었다.
러시아는 헤이룽 강 일대 원주민들로부터 모피 수입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고 식량을 징발했다. 청은 러시아 원정대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재출병을 결정했다. 앞서 1차 나선정벌을 성공적으로 끝낸 닝구타 암반장진 사르후다의 지휘 아래 출병을 준비하면서 조선군 조총수의 지원을 다시 요구했다.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는 러시아 원정대가 전력을 크게 강화한 것에 대비하여 조선군 조총수도 2배로 요청했을 것이다. 아울러 제1차 전투에 패전한 러시아 원정대가 ‘대두인(大頭人)들이 무섭다’라고 진술한 것을 알고 조선군의 증원을 요청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원정대가 두려워 한 ‘대두인’이 조선군 조총수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측의 일차적인 문제는 출병부대의 군량을 준비하고 이를 작전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스스로 운반해가는 것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조선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문제였다. 특히 최북단 변경인 함경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백성들의 생활수준이 매우 낮았다. 뿐만 아니라 조정의 통제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한 수령들의 탐학과 변장들의 수탈이 극심했다. 이에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급기야는 육진의 가장 깊은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어 천 리의 땅이 텅 비게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비변사는 함경도 변방의 경제적 어려움을 파악하고 당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끝에 비상수단을 강구하도록 효종에게 건의했다.
‘출병 군사의 3개월분 식량을 수송하는 데도 우리의 힘을 다했는데, 앞으로 언제까지 얼마나 더 많은 군량을 보내야 할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영고탑까지 군량미를 수송하려면 엄청난 수송비용이 들어서 지탱하기 어려우므로 혹시 편법으로… 곡식 대신에 경화(輕貨)·면포(綿布) 등을 가지고 가서 현지에서 곡식과 몰래 바꾸면 비용이 절약될 것이니 함경 감사와 북병사에게 지시하여 청의 통역관과 접촉할 때 은밀히 절충해 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효종이 이 건의를 받아들이자 장거리 수송에 따른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종이나 담배 같은 잡화물(雜貨物)을 준비하여 출정부대에 보급하도록 했다. 이 물품들은 부피가 작지만 현지에서 높은 가격으로 식량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법은 청나라 실무자와 비밀리에 절충하는 과정에서 반대에 부딪쳐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출정부대의 사령관에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김시성(金是聲)이 추천한 함경도 북병영의 병마우후 신류(申瀏)가 선임되었다. 그는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의 23대 후손이다. 1619년 오늘날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仁同洞)에서 출생했는데, 처음에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경서를 공부하다가 도중에 무과로 전과한 인물이다.
당시 명망 높은 선비로 알려진 장현광(張顯光) 문하에 들어가 유학자의 길을 걷다가 1645년(인조23) 무과에 합격한 후 무관직을 받았다. 그는 무인이면서도 유학자의 문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춘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나선정벌의 전체 과정을 일일이 기록했다가 귀국 후에 정리하여 《북정록(北征錄)》 또는 《북정일기(北征日記)》로 부르는 진중일기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40세였던 신류는 출정부대 사령관으로서 자신이 관할하는 9개 지역에서 선발된 조총수 200명을 지휘했다. 하지만 이들을 신류가 직접 선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피부병을 알고 있던 강응방(姜應方)을 뽑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의 수령이 선발해 보내준 인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제1차 출병 때와 마찬가지로 함경도 북병영 병마우후가 출정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4년 전 제1차 출병 때 조선군 사령관인 북병영 병마우후 변급도 제2차 출병 때와 동일한 9개 지역에서 100명을 선발하였을 것이다.
《제2차 나선 정벌군 편성》
임 무 | 인원수 | 참 전 인 원 |
영 장(領 將) | 1 | 신 류(申 瀏) |
초 관(哨 官) | 2 | 신성일(申誠一)·박세웅(朴世雄) |
군 관(軍 官) | 2 | 박대영(朴大榮)·유응천(柳應天) |
통 사(通 事) | 2 | 김명길(金命吉)·엄애남(嚴愛男) |
조총수(鳥銃手) | 200 | 길주(吉州)35, 명천(明川)16, 경성(鏡城)22, 부령(富寧)13, 회령(會寧)26, 종성(鐘城)25, 경원(慶源)23, 온성(穩城)30, 경흥(慶興)10 |
화 병(火 兵) | 20 | |
수 솔(隨 率) | 38 | |
계 | 265 명 |
출정부대는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마부 39명이 추가로 포함되자 총 304명으로 늘어났다. 조총수가 1차 출병 때보다 두 배로 증가하면서 출병 계획서인〈함경북도포수영고탑입송절목(咸鏡北道砲手寧古塔入送節目〉도 32개 항목으로 세분화되었다. 주요 내용은 《등록유초(謄錄類抄)》에 실려 있다. 《등록유초》 2010년 3월부터 7월까지 60회에 걸쳐 인기리에 방영된 MBC 드라마 〈동이(同伊)〉를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가 청나라 사신에게 넘겨주려 한 책의 이름으로, 국경 지역의 군사기밀을 기록한 서책이라고 하여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다. 〈등록유초〉에 수록된 출정군의 주요 내용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1. 영병장(領兵將)은 북도병마우후 신류를 차정한다.
2. 포수 200명은 병사(兵使)와 영병장이 함께 입회하여 북도 9관(九官) 포수로서 건장하고 사격술이 뛰어난 자를 선발한다. 9관 포수 도합 4,700여 명 중에서 한결같이 각 읍 포수 원래 수의 다과에 따라 대개 20여 명 중에서 1명을 선발하여 200명으로 한다. 갑오년(1차 출정)에 출정 경험이 있는 자는 일절 선발하지 말되 그 중에 자원자가 있으면 선발한다.
3. 포수 10명 당 화병 1명씩 총 20명을 파견한다.
6. 초관의 수솔은 초관 1명당 8명으로, 초관 2명에 16명의 수솔을 파견한다.
7. 조총은 개인 사유품이나 관용품을 막론하고 가장 우수한 것을 선정하여 지급하고, 화약과 탄환은 각각 100발 분량을 지급하고… 개인당 100발 약환은 접전할 때 사용하고 개인별로 추가 지급한 20발 분량은 이동 중 유사시에 사용한다.
9.군수품 수송용으로 군마 3필, 약환 수송용 5필을 지급한다.
15. 포수 200명은 각각 자장목 15필씩을 지급한다.
16. 화병 20명은 각각 자장목 10필씩을 지급한다.
17. 영병장 1명에게는 자장목 30필을 지급한다.
18. 초관 2명에게는 각각 자장목 20필씩을 지급한다.
19. 영병장 수솔 22명과 초관 수솔 16명 도합 38명에게는 각각 자장목 8필씩을 지급한다.
20. 갑오년 출병 때는 회령에서 영고탑(닝구타)까지 군량을 운송했는데, 이번에는 왕래할 월일을 계산하여 먹을 양식을 운반한다. 왕래할 월일을 정확히 알 수 없을 경우에는 갑오년에 군사들이 왕래한 일수에 근거하여 마련하는데 3개월 분량이 적당할 것이다. 인마가 먹을 쌀과 콩은 회령의 원곡(元穀)으로 사용하되, 1일 1인당 쌀 2승씩, 역마와 전마는 각각 콩 4승과 죽미 1승씩, 기마는 각각 콩 3승과 죽미 1승씩 준비한다.
24. 군사를 편성하는 등의 일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영병장이 주관할 것이며, 군량을 수송하는 등의 일은 함경도 관찰사가 전담하여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함흥에서 회령까지 가는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왕복하는 명령이 반드시 늦게 도착할 것이니 관찰사가 단천과 길주 사이에 군량을 책임지고 조달하여 보낸다.
25. 영병장 일행의 군수품 및 청군 장수를 접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은 함경도 감영에서 넉넉히 갖추어 지급하고, 함경도에 없는 유둔지·연죽·남초 등의 물품은 중앙 해당 관부에서 넉넉히 마련하여 지급한다.
26. 초관이하 군사들이 선발되어 출정한 후에 그 가속 등은 관가에서 각별히 구휼하고 잡역을 면제하며, 농사를 지을 능력이 없는 자는 이웃에서 지원하여 논사를 망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
29. 포수 200명 이외에 20명을 추가로 선발하여 유사시에 대비한다.
32. 영병장의 군수 잡물은 갑오년에 의거하여 마련하되 호조에서 별단으로 재가를 받고, 쇄마(刷馬, 지방에 배치한 관용 말) 1필에 실을 분량은 금군이 별도로 정하여 보낸다. 육유둔(六油芚) 1번, 사유둔 2번(유둔은 기름 먹인 두꺼운 방수 한지, 육유둔은 여섯장 짜리고, 사유둔은 넉 장짜리), 백지 100 권, 소궤(귀)지(小樻(撌)枝 3,000갑(匣), 세절남초(잘게 썬 담배) 30근, 소연죽(짧은 담뱃대) 80개, 장연죽(긴 담뱃대) 20개 (《조선의 대외정벌》385~393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반응형
'역사와 이야기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3】 제2차 나선 정벌-헤이룽 강으로 출동하다(2-2) (0) | 2024.05.15 |
---|---|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2】 제2차 나선 정벌-헤이룽 강으로 출동하다(2-1) (0) | 2024.05.01 |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0】 조선의 군사력 증강과 청의 견제-효종의 북벌의지와 현실적 난관(2-2) (0) | 2024.04.17 |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9】 조선의 군사력 증강과 청의 견제-효종의 북벌의지와 현실적 난관(2-1) (0) | 2024.04.10 |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8】 제1차 나선정벌 전투가 남긴 것 (1) | 2024.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