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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화약무기 감시
청나라가 조선에 조총 100자루를 요청한 것이 오로지 그들 군사를 무장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는지, 조선이 전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조선의 전력 강화 차단이라는 일차적인 목적과 동시에 청군의 군사력 강화라는 부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효종은 3월 16일 돌아가는 청 사절단을 도성 밖 교외로 나가서 전송했다.
그런데 3월 말에 또다른 청국 사절단이 입국했다. 조선이 화약 원료인 염초(焰硝)에 관한 금지법을 어겼다는 트집을 잡고 이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입국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대통관 이일선(李一善)과 김덕생(金德生)의 접촉 창구로 차비역관 장현(張炫)과 현덕우(玄德宇)를 임명했다. 이일선은 조선인 출신으로 그 아버지가 황해도 황주(黃州)에 살고 있었다. 이일선의 아버지를 모시는 노비라고 자처하는 오향복(吳香馥)이 3년 전인 1654년(효종 5) 7월 사절단의 행차에 끼어들었다가 평안 감사에게 적발되어 곤장을 맞고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대통관 이일선 일행은 1657년 4월 8일 효종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고, 이튿날 교외까지 따라 나온 효종의 전송을 받으며 돌아갔다. 이들 또한 만만히 돌아가지 않았다. 귀국길에 오른 이일선은 청심원(淸心元)·소합환(蘇合丸) 등 조선 의약품을 요구하여 수십 알씩 받아 갔다. 이들은 약효가 좋다는 구실을 대며 요구했는데, 도중에 먹어보고 품질과 맛이 좋지 않다고 트집을 잡고 더 좋은 최상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이 또한 더 많은 약품을 챙겨가려는 꼼수였을 것이다. 이일선은 황해도 황주를 지날 때 잠시 대열에서 이탈하여 아버지를 만났다.
이들의 행차가 만주 펑청(鳳城·봉황성:요녕성 봉성시)에 이르렀을 때 짐바리 규모가 900뭇에 이르렀으며, 평안도·황해도·경기도 백성의 힘이 모두 고갈되었다고 효종이 탄식할 정도였다. 5월 초에 입국한 또다른 사절단의 칙사는 품질 좋은 조선 칼을 선물로 받아내기 위해 은근히 눈치를 주는가 하면, 휴대품이 도난당했다고 트집을 잡기도 했다.
청나라 칙사와 그 통역관들의 횡포로 인해 조선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대통관의 동생을 사칭하며 관원들을 협박하며 이권을 챙기려는 사건마저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청나라 칙사들이 오가는 통로였기 때문에 이른바 ‘칙사대접(勅使待接)’을 하느라 백성들의 등골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 지역 백성들은 세 차례 거듭된 칙사의 행차로 인해 허리를 펼 수 없었고, 유난히 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고통이 극에 달했다. 심지어 선양(瀋陽)에서 지내는 주요 제사의 제수용품(祭需用品) 일부를 부담하기까지 했다.
선양은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여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였던 큰 도시다. 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유린했던 청 태종 훙타이지의 무덤인 소릉(昭陵)을 비롯하여 주요 인물들의 무덤이 많기 때문에 관련 제사도 많았다.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은 연례적으로 배 1,000개, 잣 20말, 꿀 10말을 제수용품으로 보내야 했다. 은행 10말은 경기도 백성들의 몫이었다. 선양 근교인 영릉(永陵)에도 훙타이지 선조들의 묘소가 즐비하니, 그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잡다한 경제적 부담들이 조선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5월 하순에도 칙사가 입국하여 조서를 반포하고 엄청난 예물을 챙긴 후 6월 4일 효종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갔다. 두 차례 호란을 겪은 후 재기하려는 조선을 괴롭힌 인재(人災)와 천재(天災)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안팎의 어려움
조선은 청나라의 감시와 견제 속에서도 군사력 증강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가뭄으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자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산성 축조와 강화도 방위력 증강 공사를 반대하는 상소가 대표적이었다. 비밀리에 추진할 수밖에 없는 군사력 증강 사업은 속도가 더딜 뿐 아니라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영돈령부사 김육(金堉)은 1657년 5월에 양서(兩西, 황해도·평안도)와 삼남(三南, 경상도·전라도·충청도)지방의 어려운 실정에 대해 “경기의 백성들은 길바닥에서 반년을 보냈고, 삼남의 백성은 모내기를 마쳤으나 이미 모가 말라버렸으므로 다시 비가 내려도 소용이 없고, 삼남과 양서 지방이 모두 농사를 망쳤으니 나라가 무엇으로 지탱하겠는가” 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경기 서쪽은 간혹 비가 내리기도 했으나 삼남 지방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데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서 쌓인 원망이 매우 많다고 전제하고, 신속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경제 문제에 조예가 깊었던 김육은 호남 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한 인물이다.
한편 중신인 송시열(宋時烈)은 당시 조정의 급선무를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군대를 육성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국왕은 군대를 육성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한 푼의 돈이나 한 자의 베라도 근검절약하여 오직 군사를 양성하는데 투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효종의 스승으로서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분위기와 정책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예컨대 지방의 육군 사령관인 병마절도사와 해군 사령관인 수군절도사를 무신(武臣)이 아닌 문신(文臣)으로 교체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칙사들이 왕래하는 통로인 평안도·황해도의 조폐(凋弊)가 더욱 극심하기 때문에 문신 중에서 군사 문제에 조예가 있는 관원을 엄선하여 시험적으로 파견하자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건의에 따라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변방지역과 후방지역을 막론하고 군사 훈련에 조총을 사용하지 않고 무기고에 보관해 두기만 하고 있었다. 이 같은 문제점을 효종이 참석한 1657년 10월 7일 경전 강의 때 무신 당상(武臣堂上) 민태형(閔泰亨)이 지적했다. 그는 1648년(인조 26) 함경도 경원(鏡源)에서 근무하다가 함흥(咸興)의 함경도 감영(監營) 소속 중군(中軍)으로 5년 정도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민태형의 주장에 따르면 함경도 경원을 비롯한 두만강 하류 남안의 국방상 요충인 종성·온성·회령·경흥·부령의 육진 지역에서는 개별적으로 조총을 소유하고 연습해서 사격술이 뛰어난 군사가 다수 있었다. 그러나 군용 조총은 무기고에 보관만 해두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고 한다. 조총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월경할 것을 우려하여 아예 무기고에 넣어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남도(南道)의 경우는 육진처럼 우려스러운 상황은 아니지만 분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관청에 영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총 사격 훈련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거의 무용지물로 무기고에 처박혀 있는 실정은 아마 전국이 똑같았을 것이다. 특히 남도에서 조총을 무기고에 영치해둔 경우는 효종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효종이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던 군사력 강화 정책은 조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장애물이 중첩하면서 좀처럼 가시적인 성과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대외정벌》381~385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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