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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6세기 말 해양세력 일본의 침공을 받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로부터 30여 년도 채 지나지 않은 17세기 초반에 대륙세력 여진족(女眞族)의 대대적 침공을 받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불리는 첫 번째 침공은 1627년으로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부르던 시기며, 1636년의 두 번째 침공인 병자호란(丙子胡亂)은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직후다. 이 병자호란 때 조선 국왕 인조(仁祖)와 조정 중신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성하여 최후의 수성전을 전개한 것이다.
후금은 1616년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국가다. 앞서 명은 후금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벌전쟁을 단행하였고,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해 왔다.
당시 국왕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심각하던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소극적으로 명군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고, 명과 후금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중립 외교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조선은 광해군 재위 중에는 후금의 침공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3월 인조(仁祖)가 광해군을 축출하고 즉위한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것은 서인(西人) 정권이 대후금 외교를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李适) 일당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후금으로 망명하여 대조선 침공을 유도하고, 평안도 앞바다 가도(椵島)에 주둔 중인 명나라 모문룡(毛文龍) 군이 조선의 지원을 받으며 후금의 측면을 위협하는 상황이 호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밖에 후금 내부에 축적된 문제도 조선 침공을 단행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예컨대 태종 즉위 후로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불만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는 문제, 한인(漢人) 포로들의 농경지 이탈과 대명 교역 중단에 따른 생필품 부족 현상 등을 타개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금군 1차 침공인 정묘호란은 1627년 1월 8일, 태종이 3만 6천 기병을 이끌고 수도 심양(瀋陽:랴오닝성 선양)을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후금군은 의주(義州)와 그 북쪽의 창성(昌城)을 통해 꽁꽁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다. 후금군의 진로를 차단하지 못한 조선군은 개전 수일 만에 전선을 황해도 북단으로 후퇴시켰다.
전선이 수도권에 육박하자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국왕과 세자가 강화도와 전주(全州)로 각각 이동했다. 결국, 후금군은 내륙으로 깊숙이 남진하게 되었고,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義兵)은 이들의 퇴로를 위협했다. 한반도 북부의 산악지역에서는 그들의 활동무대인 광활한 만주벌판과 달리 시계(視界)가 제한되고, 매복 기습공격에도 취약한 기병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후금군은 전쟁이 장기화하는 것을 우려하여 조속히 강화를 성립시키고, 철군의 명분을 확보할 속셈으로 조선을 압박하였다.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627년 3월에 조선은 후금을 ‘형(兄)’으로 예우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1636년 4월 후금이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군주를 황제(皇帝)로 개칭하면서 조선과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君臣關係)’로 수정할 것을 요구해 왔다. 후금군의 침공 위협을 다시 받게 된 조선에서는 강경 척화파와 온건 주화파로 여론이 갈라졌다.
인조(仁祖)가 강경 방침을 채택함에 따라 그해 12월 여진군(女眞軍) 7만 명을 주축으로 하고 몽골병(蒙古兵) 3만 명과 한병(漢兵) 2만 명이 혼합 편성된 12만 대군의 침공을 받았다. 침공군은 이미 1차 침공 때의 기동로를 따라서 빠른 속도로 쳐들어왔다. 결빙한 압록강을 평지처럼 건넌지 수일만인 12월 14일 수도 한성 근교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거점을 옮겨 항쟁하면서 각 지방의 근왕군(勤王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중앙군 1만 4천여 명과 문무백관 기타 3백여 명이 12월 15일부터 수성전을 전개할 대세를 갖추었다.
12월 18일 한성에 무혈입성한 청군이 주력군 2만 4천 명을 남한산성의 동·서·남쪽 일대에 배치하여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후로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화의 교섭도 함께 추진되었다. 그것은 청군 지휘부가 오히려 화의 교섭에 적극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소극적 수성전이나 화의 교섭에만 매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출성하여 청군의 인명 피해를 강요한 점이 일반적인 공방전 사례와 비교된다.
이에 청군도 화포(火砲)를 동원하고 운제·충차와 같은 재래식 공성무기도 투입하여 대소규모의 공성전을 수차례 전개했다. 그러나 주력군인 기병이 작전하기에 불리한 남한산성의 지형적 특성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력으로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앞서 1631년 명나라 금주성 공방전에서 포위망을 강화하여 항복을 받아낸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남한산성을 장기간 포위함으로써 스스로 투항하도록 압박하려는 전략적 측면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한산성을 장기간 포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시 청군은 기병전에 의한 속전속결을 주특기로 하는 전략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한산성이 일반적인 산성이나 평산성과 달리 기병의 접근은 물론 보병의 공성무기도 사용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사실에 직면하자 공성 전략을 세우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무모한 공성전을 전개하기보다는 오히려 포위망을 구축하여 외부와 연결을 차단하는 압박전략을 채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지방 근왕군이 청군에게 격파되었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군량마저 고갈되자 항전역량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특히 강화도(江華島)에서는 청군이 수전(水戰)에 익숙한 한병(漢兵)과 사거리가 긴 홍이포(紅夷砲)를 동원했다. 이 때문에 조선 방어군은 강화해협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인조가 또다시 강화도에 입도할 사태에 대비하여 청군이 한병(漢兵)을 동원한 사실을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강화성에 피신 중인 왕실 가족들마저 포로가 되자 남한산성에 입성한 지 45일 만인 1월 30일 남한산성 수성전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즉 청군의 강화성 함락이 남한산성의 성문을 여는 열쇠가 된 것이다.
조선이 남한산성 수성전을 포기함에 따라 국왕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체결함으로써 국가 위상은 청국의 신하국(臣下國)으로 떨어졌다.
그 후 반청의식이 고조되면서 청국에 패배한 민족적 치욕을 설욕하기 위한 북벌운동(北伐運動)이 암암리에 추진되기도 했다.(『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223〜22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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