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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한국의 성곽 공방전 7-7. 西歐 列强의 침입과 강화도 공방전(1866·1871)

by 히스토리오브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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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제국이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하고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리자 노대국 청나라도 열강의 상품 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전락했다. 뒤이어 일본도 개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동양 삼국 중에서 오직 조선만이 쇄국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으로 ‘양요(洋擾)’가 발생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을 유인한 정산성 전투 기록화
미군 함대를 포격하는 손돌목 포격전 기록화

1866년의 병인양요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와 한강 수로의 입구를 봉쇄하면서 야기된 무력 충돌사건이다. 이해 정월,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되자, 리델은 텐진(天津)으로 탈출하여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극동함대가 1866년 9월 정찰을 마치고, 10월 군함 7척으로 재침하였다.

강화부 전경(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1930)

이들이 강화도 갑곶나루에서 강화성으로 쳐들어오자 10월 15일부터 16일까지 조선군이 두 차례 수성전을 전개했으나 강화 읍성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금위영 산하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를 기보연해도순무사, 훈련도감 중군 이용희(李容熙)를 순무중군, 주교도청(舟橋都廳) 양헌수(梁憲洙)를 기보연해순무천총에 각각 임명하였다.

복원된 강화 읍성

조선군은 강화해협과 한강 수로의 요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일대에서 프랑스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이때 순무초관 한성근(韓聖根)은 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잠복하였다. 이들은 10월 26일 프랑스군 정찰대를 기습 공격하여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두어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복원된 문수산성

한편 통진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천총 양헌수 군 5백여 명은 11월 7일 야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은밀하게 정족산성으로 이동한 후 3개 제대로 재편하여 정족산성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양헌수 군 주력이 배치되었던 정족산성 동문(외부)

11월 9일 프랑스군 150여 명이 정족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양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을 유인 전술로 끌어들여 30여 분간 집중사격을 가한 결과 3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갑곶진의 본대로 물리쳤다.

인근 주민들이 건립한 천총 양헌수 승전 기념비(동문 안쪽)

이를 계기로 프랑스함대는 스스로 철수하여 청국으로 되돌아갔다. 조선군은 사격술이 뛰어난 산포수(山砲手)를 주축으로 편성되었는데, 궁시나 대포가 아닌 개인화기 화승총으로 수성전을 전개하여 침공군을 물리친 특징이 있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산포수의 최신 사냥총
조선말기 산포수의 일반적이 모습

이로 인해 프랑스함대는 당초의 침공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위신의 실추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조선측은 독자적 역량으로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어 쇄국정책을 더한층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5년 후에 미국 함대의 침공으로 시작된 1871년 무력 충돌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인 1866년 8월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Sherman)호가 대동강에서 평양 군민들과 충돌하여 선박이 전소되고 선원도 전멸한 사건이 있었다.

제너럴셔먼호의 초기 모습 스케치

이 사건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외부로 알려졌다. 미국은 1866년 말경에 개략적인 정황을 파악하고 조사에 착수하여 1868년 5월 그 전모를 확인하였다. 이때 미국은 사건의 책임을 규명하고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주도한 평안감사 박규수 초상화(부분)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 군함 5척이 일본 나가사키항(長崎港)을 떠나 조선해역으로 들어왔다. 5월 30일에는 조선측 관원들과 접촉하면서 통상교역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회선을 요구하는 한편,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영(鎭撫營) 중군에 임명하여 강화해협 일대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강화 진무영 전경

아시아 함대의 탐사대가 6월부터 강화해협으로 진입하여 손돌목(孫乭項)을 거쳐 광성보로 접근하자 조선군 수비대가 포격을 감행하였고, 이에 미군 탐사대가 응사함으로써 대포 사격에 의한 해상과 지상의 공방전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포격전을 벌인 손돌목 돈대와 강화해협
미군 함포 포격에 초토화된 돈대 내부

6월 10일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草芝鎭)이 초토화된 후 강화해협 연안의 여러 진이 차례로 공격을 받았다. 초지진에 이어 덕진진(德津鎭)이 함락된 직후에 조선군은 두 차례에 걸쳐 미군 진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미군에게 점령당한 덕진진의 덕진 돈대

이어 미군이 광성보 공격을 개시하자 광성보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있던 중군 어재연 군이 격렬히 대응하였다. 해안 돈대와 포대를 중심으로 한 지상과 미군 함포의 해상 포격전으로 전개되었는데, 조선군이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양상의 공방전이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여, 대부분 장병이 전사했다.

광성보의 광성 돈대와 강화해협
신미양요 전사자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2007년 영구임대로 반환된 조선군 지휘부의 "수"자기

그런데 미군은 조선을 개항시킨다는 그들의 당초 목표를 포기하고 7월 3일에 작약도를 떠나 청국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조선은 자력으로 미군 함대를 격퇴시킨 것으로 단정하여 쇄국주의 노선을 더한층 강화하였다. 전국의 교통 요지에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국민의 적개심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국내 유일 자연석 척화비(구미 구포동, 경북 지방문화재 제0022호)
창녕 척화비(문화재자료 제218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함양 척화비(문화재자료 제264호, 경남 함양군 함양읍)
화양 척화비(청도군 화양읍)

1866년과 1871년의 양대 양요는 서해 해상을 통하여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 및 미국 함대와 조선군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서,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공방전과 다른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즉 한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근대화된 서양의 군사력에 대항한 공방전이었다.

근대화된 무기로 무장한 미군

종래로 이민족(異民族)의 무력침공은 주로 중국의 한족(漢族)이나 북방민족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게 되자 공방전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조선군은 서양세력과는 거의 접촉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대응전략이나 전술을 개발하지 못했고, 결국 종래와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의 공방전에 직면하여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모양의 배'라는  '이양선'의 근대화 된 전함

그리고 병인·신미양요가 전근대적인 조선군과 근대화된 프랑스군 및 미군 사이의 전투기법 내지는 화기 성능을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실험장(實驗場)이 된 사건이었다. 근대화된 서양 대포는 발사 속도가 월등히 빨랐을 뿐 아니라, 포탄도 단순한 쇠 구슬이 아닌 폭발탄(爆發彈)이었으므로 살상 효과가 매우 컸다.

조선군의 다양한 쇠구슬 포환(육군박물관)

조선군이 발사하는 포환이 단순한 쇠뭉치인 것에 비하여, 이들의 포탄은 폭발과 동시에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여 주변의 인마(人馬)를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때 대포(大砲)를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화기인 소총이 공성전(攻城戰)의 주력화기가 되었다.

조선군의 시한 폭발탄인 비격진천뢰

조선군의 화승총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면 사격이 곤란했으나, 프랑스군의 소총은 날씨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뇌홍식(雷汞式)이었다. 비록 전통적인 공성 장비가 동원된 방식의 공성전은 아니었으나, 재래식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되자 화기의 열세를 극복한 조선군이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조선군의 화승총(강화전쟁박물관)
뇌홍식 소총과 화승총(강화전쟁박물관)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가 조선군에 의하여 침공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조선의 승리로 인식된 것도 부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선교사 학살사건,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삼아 조선을 압박하여 개항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프랑스군이나 미군이 급작스럽게 철수하자 조선군이 이들의 기도를 와해시켰다는 측면에서 조선측의 승리로 인식되었다. 이는 재래식 공방전에서 공성 세력이 성곽 점령을 포기하고 퇴각하면 수성 세력이 승리한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상황인식 때문일 것이다.(『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279〜283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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