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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주재 미국 영사관은 1868년 5월 하순 조선 해역에서 즈푸항으로 돌아온 셰난도어호가 조사한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리고 5월 25일부로 본국 국무부에 제너럴 셔먼호 관련 소문이 모두 낭설이라고 보고했다. 9월 28일자 보고서에서는 조선 개항과 사절단 파견 문제를 건의했다. 그러나 해군 장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후 1869년에 그란트 행정부가 출범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조선을 개국시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외교 관계를 개설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1870년 11월 외교 사절단에 관한 전권을 로우(F. F Low) 공사에게 부여했다.
로우 공사는 베이징에서 로저스(J. Rodgers) 제독 및 시워드 총영사를 초청해 대책을 숙의했다.
그리고 1871년 2월 11일과 15일 청국 총리아문의 공친왕을 방문하여 사절단 및 함대 파견계획을 통보하고 적극적인 협조와 중재를 요청했다. 이어 3월 7일에는 로우 공사가 조선에 보내는 서한을 청국의 총리아문에 전달하고 이를 조선에 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청국 총리아문에 접수된 로우 공사의 서한은 그해(1871) 4월 10일부로 조선 조정에 접수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4월 14일부로 청국 예부에 조선의 입장을 밝히는 형식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 무렵 미국 아시아 함대는 로저스 제독의 지시에 따라 5월 초순까지 일본 나가사키항에 집결하였는데, 군함 5척 대포 85문과 해군 및 해병 1,230명으로 원정대를 편성했다. 로우 공사가 나가사키항에서 아시아 함대에 합류하자 5월 16일 조선 해역을 향해 서북으로 항진했다.
미국 아시아 함대는 3일 후인 5월 19일 조선 해역으로 진입하여 충청도 해미현 해상을 거쳐 21일 남양만의 풍도 해상에 정박했다. 23일에는 아산만의 입파도 근해로 이동하면서 팔로스호와 단정 4척으로 탐사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27일 강화해협 어귀에 이르기까지 탐측활동을 벌인 후 28일 기함의 정박지로 돌아갔다.
아시아 함대는 29일 작약도를 경유하여 그 이튿날 아침에는 작약도 동북쪽 율도와의 중간해역으로 정박지를 옮겼다. 이어 5월 31일에는 조선 문정관 3명이 콜로라도호를 방문하여 로우 공사와의 회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우 공사가 회담을 기피했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로우 공사가 조선 조정에 보내는 서신만 받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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