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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19) - 손돌목 포격 사건과 초지진 전투

by 히스토리오브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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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미년 5월 30일, 강화 해역으로 이동한 아시아 함대는 포함 2척과 소형 함정 4척으로 탐사대를 편성하고, 6월 1일 정박지를 떠나 정오경 강화해협 입구에 이르렀다.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손돌항) 돈대

당시 강화해협 초지진에서 북쪽으로 갑곶 나루에 이르는 50리 해안선 포대에는 대포 70여 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광성보 인근 손돌목 돈대에는 지휘소가 설치되어 아시아 함대 탐사대의 활동을 감시했다. 

원형경기장 같은 손돌목(손돌항) 돈대(신미양요 때 파괴된 것을 복원)
손돌목(손돌항) 돈대서 바라본 강화해협의 손돌목(손돌항)

아시아 함대의 탐사대가 오후 2시경 손돌목 어귀에 접어들자 지휘소의 포성을 신호로 하여 해안 포대가 탐사대를 향해 포격을 집중했다. 미군 탐사대도 응사함으로써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강화해협 손돌목(손돌항)의 급류
상륙전 기록화와 왼쪽 달그랜보트 실물 대포( 미국 해병대 박물관, 박보균 촬영)

아시아 함대의 포함 모노카시호가 8인치 대포의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발탄을 연속 발사하자 조선군 포진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약 15분 동안 조선군 포대가 퍼부은 2백여 발의 포탄(포환, 철환)은 아시아 함대의 포탄과 같은 폭발탄이 아니었다. 단순한 쇳덩이 포환이었다.

폭발하지 않는 철환(용산 전쟁기념관)

살상효과가 매우 낮아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결국 조선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진지에서 퇴각함으로써 조·미 양군의 교전상황은 일단 막을 내렸다.

손돌목 돈대의 처참한 상황
미군의 포연이 자욱한 조선군 진지
항해하는 이동 표적을 효과적으로 포격하기 위한 포진지(사례 : 남장포대)

아시아 함대 지휘부는 조선군 수비대가 불법적으로 선제공격을 가했다고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6월 6일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보내어 손돌목 충돌사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정당방위라고 맞섰다.

복원된 손돌목 포대 포진지 일부(강화해협 쪽으로 고정된 포구방향)

결국 아시아 함대는 그들의 의도대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6월 10일 탐사대장 블레이크 중령의 상륙부대를 투입해 강화도 상륙을 감행했다.

미군 상륙 부대 650여 명은 10일 정오 무렵, 강화해협 입구 초지진 동남방의 황산도 앞 해상에서 상륙을 시도했다.

추정되는 황산포대 유적(현재 강화도와 연결된 황산도)

조선군 수비대는 포격전으로 맞섰다. 포구가 고정된 대포 12문을 보유하고 있는 초지진 남쪽의 진남포대를 중심으로 상륙 부대에 포격을 집중했다. 무기의 성능 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은 사상자가 속출하자 일단 후퇴했다.

복원되지 않은 강화도 포진지의 일반적인 모습
진남포대 추정지

아시아 함대의 해군과 해병 혼성부대는 초지진 남쪽 해안지역 일대에 접안하고 넓은 갯벌을 통과한 후 4시경 텅 빈 초지진을 점령했다.

복원된 초지돈대와 미군 포탄의 상처가 남아 있는 소나무
초지돈대 내부와 대포 전시 건물

앞서 초지진에서 퇴각한 조선군은 미군 상륙부대가 야영중인 진지에 야간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당시 이들은 야간에도 흰색 전투복을 입었기 때문에 미군에게 쉽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광성보 방면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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