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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17) - 제너럴 셔먼호 격침 사건 조사

by 히스토리오브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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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 평양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격침되었다.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9월 말부터 10월 초에 이르는 프랑스 극동 함대의 제1차 침공 때였다. 청국 주재 미국 영사는 10월 중순경 사건 전모를 청국주재 미국 공사관에 보고했다. 청국 주재 미국 대리공사는 10월 23일 청국 총리아문에 서한을 보내어 생존자가 있으면 귀환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너널 셔먼호(항해도 삽화)

한편 미국 공사관은 청국의 총리아문에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프랑스와 영국에 공동출병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 공사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에게 진상 조사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미국 군함 와츄세트호가 조선해역에 들어와 경위를 조사하게 되었다.

와츄세트호는 1867년 1월 21일 산둥반도 즈푸항을 떠나 23일 황해도 장연의 월내도 근해에 정박했다. 장연 현감 한치용이 와츄세트호를 방문하여 즉각적인 회선을 요구하자 일단 즈푸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베이징의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은 자국인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들이 송환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청국의 총리아문에 촉구했다. 그러나 청국 총리아문은 독립국가인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국 주재 미국 공사관은 교섭경위를 국무성에 보고하면서 아시아 함대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셰난도어호(Shenandoah號)가 1868년 4월 7일 즈푸항을 떠나 4월 10일 황해도 풍천 북쪽 대동강 어귀의 허사동에 도착해 편지를 전달했다.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들을 조속히 석방해 줄 것과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에 조선측 고관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측은 이미 청국 예부를 통해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에게 와츄세트호 함장의 서신에 대한 답신을 전달한 바 있었다. 셰난도어호 함장이 또다시 요청하자 앞서 청국 예부에 발송한 서신의 사본을 보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선원들의 난폭한 행동이 평양 군민들을 자극한 결과, 무력충돌로 확대된 것이라고 해명한 후 생존자도 없다고 통고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기록화

셰난도어호가 삼화부 해역에 정박하자, 4월 15일 조선 문정관이 방문하여 항해 목적과 요구사항을 조사했다. 셰난도어호는 4월 24일까지 답신을 기다리다가 용강현 경계로 올라갔다. 결국 조선 문정관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한 후 일단 조선 해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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