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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20) - 강화도 광성보 전투

by 히스토리오브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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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시아 함대 상륙부대는 초지진을 점령한 후 강화해협을 따라 북상했고, 포함 모노카시호는 1871년 6월 11일 새벽부터 덕진진에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했다.

수심이 앝은 바다에도 항해할 수 있는 1370톤급 모노카시호

이로 인해 덕진진의 조선군도 피해를 입고 후방으로 퇴각했다. 아시아 함대 상륙부대는 초지진 후방에서 야영한 후 11일 덕진진을 무혈로 점령하였다. 퇴각했던 조선군 수비대는 덕진진에 진입한 상륙부대에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미군에게 점령당한 덕진돈대
복원된 덕진돈대
덕진돈대 앞 해상을 향해 서 있는 경고비(비문 : 해문방수 타국선 신물과)

이 무렵 광성보 일대에는 진무영 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는 병력 5초가 투입되었으므로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런데 아시아 함대의 해상 지원부대가 11일 정오 이후로 광성보 일대에 함포사격을 개시하고, 상륙부대도 대포 4문으로 조선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자 광성 돈대를 중심으로 주둔한 어재연의 조선군이 전후방 양면에서 1시간 이상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미군에게 점령당한 조선군 진지와 조선군의 불랑기포

아시아 함대 상륙부대가 서·남·북 3면에서 포위망을 좁히면서 공격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단시간에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미군에게 빼앗긴 중군 어재연의 부대기(일명 수자기, 콜로라도호)
임대 형식으로 돌아온 수자기 환영 행사(2007.10.22)
복원된 광성보의 광성돈대

결국 최후 백병전이 벌어졌다. 중군 어재연도 장검을 빼들고 뛰어들었다. 최후 방어전은 실패로 끝나고 중군 어재연과 조선군 350여 명이 전사했다.

포로가 되어 함상에 억류된 조선군
미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군과 면담하는 조선 문정관

아시아 함대 상륙부대는 광성보 일대에서 숙영한 후 이튿날(12일) 각종 노획품을 모노카시호에 옮겨 싣고 강화해협을 빠져나갔다. 작약도 모함 기지로 돌아간 후 율도 백사장에 장대를 꽂고 그 끝에 편지를 매달아 전달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차례 교섭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미국 아시아 함대는 7월 2일 서한을 마지막으로 3일 작약도(원명:물치도) 정박지를 떠나 5일 청국 즈푸항으로 되돌아갔다.

물치도(작약도)의 현재 모습
신미년에 전사한 조선군 시신을 전투현장 인근에 합동 안장한 '신미순의총'
형 어재연과 함께 전사한 어재순 형제 묘소(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 산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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