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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대동강에 나타나 군민들과 무력 충돌하는 등 소요를 일으키다가 급기야는 소각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의 주요 원인이 된 사건이다.
미국 선적의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여름 청국의 텐진항에 입항한 후 비단·유리제품·아연판 등을 적재하고 7월 29일 조선을 향해 떠났다. 산둥반도 즈푸항에 들려서는 영국인 토머스(R.J. Thomas) 목사를 통역인으로 채용하는 등 선원도 보강했다.
이어 8월 중순 경 백령도의 두모포를 거쳐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으로 이동했다. 이때 조선 문정관이 이들을 방문하여 제너럴 셔먼호에 탑재한 각종 무기류들을 소개받았다.
그 후 제너럴 셔먼호가 황주목 삼전면의 급수문에 이르자 황주 목사 정대식이 식료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청국으로 되돌아갈 것을 재차 설득했다. 이에 8월 21일 평안도 육군 최고 사령관인 병마절도사(병사) 이용상은 중영리 김약수를 급파하여 항해 목적과 선적 및 승선인원 등을 상세히 파악했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는 소형 정찰선을 대동강 상류로 올려보내 수심을 측정하는 등 탐사작업을 계속하면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만경대 아래 두노도 앞으로 이동했다가 24일 오후에는 한사정 부근까지 진출하여 이틀 동안 머물렀다. 제너럴 셔먼호의 정찰활동이 계속되자 조선측도 정찰선을 투입하여 이들을 밀착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의 정찰선이 순영 중군 이현익 일행을 납포한 후 돌려보내지 않았다.
조선 지방관들은 군사를 이끌고 강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28일 아침에는 보통강 하구로 이동하면서 대동강 북안에 대포와 소총을 난사하다가 황강정 앞에 닻을 내렸다. 석방 교섭이 결렬되자 격분한 평양 주민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부근에서 경비하고 있던 군사들도 주민들의 시위에 합세함으로써 급기야는 군민 합동 무력시위로 번졌다. 마침내 이현익 일행은 석방되었고, 셔먼호는 29일 양각도 서쪽에 정박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이 강안에 상륙해 주민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유혈사태로 인해 평양 군민은 분노했고, 적개심은 극도에 달했다. 평안도의 군정 최고 책임자인 관찰사(감사) 박규수(朴珪壽)는 조정의 지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9월 5일 아침 제너럴 셔먼호가 정박한 대동강변에서 화공작전을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화공용 소형 선박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길을 당겼다. 선원들은 대부분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하고, 일부는 조선 군민들의 총탄과 화살 또는 돌멩이에 맞아 사망했다. 헤엄쳐서 강가로 나온 선원들도 흥분한 군민들에게 타살되었다. 이와 같이 제너럴 셔먼호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평안 감사 박규수는 9월 5일 노획물 리스트를 작성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이 보고서에 근거하여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체 과정을 공문서로 작성하여 청국 예부(외교부)에 통보하기로 했다. 청국 정부에 사건의 전모를 미리 알려 줌으로써 왜곡된 정보가 전달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한편 조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외세의 침략도 자력으로 격퇴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조야에서는 반외세적 저항 의식이 더욱 팽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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