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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순무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의 지휘를 받아 긴급 출동했다. 그러나 1866년 10월 18일 통진부에 도착한 이래 10여 일 동안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형 어선을 징발하여 잠입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11월 1일 어선 5척을 확보하여 덕포 나루에 숨겼다.
천총 양헌수가 이끄는 선발대 38명을 선두로 하여 11월 6일 정오경부터 덕포 나루로 이동하면서 침투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날 저녁 무렵에 후속부대가 도착하여 선발대와 합류했다.
11월 7일 날이 어두워지자 제1진 170명이 3척으로 광성 나루에 상륙하여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 제2진과 제3진도 8일 새벽 정족산성에 진입했다. 이와 같이 조선군 5백여 명은 비밀리에 집결하여 차기 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선군이 11월 8일 정족산성에 방어배치를 완료할 무렵 프랑스 함대 사령관도 이 사실을 탐지했다. 조선군이 전등사에서 항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이에 로즈 제독은 육전대장 올리비에(Olivier) 대령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11월 9일 오전 7시경 프랑스군 정찰대 150여 명이 정족산성을 향해 떠났다. 이들이 정족산성 산록 동남방에 도착할 무렵, 조선군 매복조는 이미 정족산 어귀에 배치되어 있었다.
정족산성 남문과 동문 일대에 배치된 조선군의 유인조는 프랑스군이 접근해 오자, 이들에게 자신을 노출시켰다. 계획된 방향으로 유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조선군은 프랑스군 주력부대를 산성 전방 1백여 미터 지점까지 끌어들인 후 오후 2시경 일제 사격을 실시했다.
프랑스군은 30여 분간 격전에서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접전을 포기하고 3시경부터 축차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정족산성의 조선군은 불과 수 십분 동안 공방전을 벌이면서 프랑스군의 막강한 화력을 체험했다.
이날(11. 9) 자정 무렵 관서지방 포수 88명이 화약 11 상자를 가지고 덕포나루를 건너 정족산성에 입성하는 등 증원병력이 합류하자 장병들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이튿날(11. 10) 프랑스군은 강화유수부 일대에 불을 지르고 전리품을 챙겨 오후 4시 무렵 갑곶나루로 철수했다. 이어서 함대 전체가 갑곶 앞바다에 이르러 퇴각 준비를 갖추었다. 이날 야간에 승선을 완료한 상태에서 만조가 되자 11일 새벽 6시 갑곶 앞바다를 빠져나갔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뜻밖에 타격을 입자 강화도에서 서둘러 철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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