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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9】 조선의 군사력 증강과 청의 견제-효종의 북벌의지와 현실적 난관(2-1)

by 히스토리오브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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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조총 요구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 이데올로기인 ‘북벌(北伐)’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즉위 초부터 청의 감시를 피해가며 군사력 강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금위영(禁衛營) 군사들의 복색(服色)과 옷 형태를 실용적으로 개조하는 조치를 단행한 것은 효종의 관심이 군사력 증강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금위 장사(禁衛將士)들의 경우는 활동이 용이하도록 소매 짧은 군복으로 개선하고, 기타 위졸(衛卒)들의 군복도 선명한 색상의 화려한 비단으로 제작하였다. 실질적 국방군인 중앙군의 사기를 높이고 위상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금위영 터 표지석(네이버블로그)

즉위 8년째인 1657년 1월에 효종은 조정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훈련대장 이완에게 훈련도감의 군사력에 대해 물었다. 이때 이완의 보고에 의하면 훈련도감의 총병력을 5,650여 명이었다. 기병(騎兵)을 확충하는 일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고 보고했다. 장차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서는 기병 전력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의미였다. 효종은 “친위병이 이처럼 적은가” 라고 탄식했다. 이어서 훈련도감은 1만 명으로 확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어영청은 2만 명을 확보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효종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병력 규모였을 것이다.

조정에서 논의된 훈련도감(훈국) 관련 사항을 기록한 '훈국등록'
훈련도감 터 표지석(네이버블로그)
어영청 터 표지석(네이버블로그)

이 같은 상황에서 청나라로부터 예상치 못한 요구사항이 전달되어 곤욕을 치렀다. 이때 사절단의 수석 통역관인 대통관 이몽선 일행이 휴대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문제가 되었다. 자문의 요지는 최상품 조총 100자루를 선별하여 만주 봉황성(鳳凰城:랴오닝 성 펑청 시)으로 수송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은 조동립(趙東立)과 현덕우(玄德宇)를 차비역관으로 임명하여 이몽선 일행과 교섭을 벌였다.

의주에서 봉황성까지 조총 수송 경로(구글지도)
봉황성이 있는 봉황산 유원지 입구(구글지도)

 

이몽선은 본래 조선 사람인데 그때도 아버지가 동대문 밖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입국한 직후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귀국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 사절을 보좌하며 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과거 원나라에 귀화한 고려인이 사절로 파견되어 온갖 횡포를 부리며 고려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것과 유사한 사례다. 몽골족의 원나라든 한족의 명나라든 여진족의 청나라든 막론하고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일환으로 이런 방법을 답습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효종이 청나라 사절을 맞이한 창덕궁 인정전(문화재청)
창덕궁 인정전 내부 용상(문화재청)

조선의 차비역관들은 청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몽선을 연락 창구로 이용하며 요구 사항을 조정에 전달하기 급급했다. 조총의 성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몽선은 자신이 입회한 가운데 군기시(軍器寺)의 고위 당상관이 실제로 사격하는 것을 보고 나서 선택하는 교활한 방법을 동원했다. 조선 조정은 그의 요구에 따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총은 일본제가 우수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1621년 일본이 조총을 비롯한 무기류를 수출 금지 품목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소규모로 밀수입되고 있었다. 청에서는 일본제 왜조총(倭鳥銃)과 조선에서 만든 향조총(鄕鳥銃)을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최상품 조총만 찾고 있었는데, 왜총이 우수한 것을 이몽선도 알고 있었기에 선별 대상에 왜총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장거리 운송에 대비하여 조총을 안팎으로 포장하는 피대(皮帒)와 수송용 궤짝을 특별히 준비해야 하는 부담도 떠안았다.

서울시청 신청사 건설현장인 군기시 터에서 발굴된 승자총통 유물

조선 조정은 1657년(효종 8) 3월 7일 조총 100정을 선별하여 이몽선 일행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모두 서연청(西宴廳)에 나와서 성능을 확인한 후 그중에서 다시 19자루를 골라냈다. 나머지 81자루가 퇴짜를 맞은 것이다. 이 같은 결과를 보고 받은 효종도 난감해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변사 관계관들이 처벌을 받기까지 했다.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선별해서 전달한 것 중에서 무려 80%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이몽선 일행의 추가 요구사항이 전달되었다. 각 총마다 철환(鐵丸) 5개·남라개(南羅介) 1부·약승(藥升) 1개를 함께 곁들여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철환 500개·남라개 100부·약승 100개를 준비하되, 철환과 약승은 군기시(軍器寺)에서, 남라개는 호조와 공조에서 준비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조선은 앞서 훈련도감 군사들에게 지급해 준 왜조총 180여 자루와 사대부(士大夫)들이 가지고 있던 20여 자루, 병조가 보유한 10여 자루를 합하여 총 200여 자루를 확보했다. 그리고 훈련도감 군사들을 동원하여 조총의 장식을 수리하고 손질한 후 다시 들여보낼 준비를 마쳤다.

조선후기 조총과 주요 부수기재(네이버블로그)

그중 100자루를 전날 퇴짜 맞은 81자루와 함께 보낼 계획이었으나, 효종의 지시에 따라 그 절반인 50자루를 들여보냈다. 한꺼번에 모두 보냈다가 무더기로 퇴짜를 맞을까봐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두 131자루를 들여보내자 대통관 일행은 차지당상(次知堂上) 행호군(行護軍) 이수창(李壽昌)이 입회한 가운데 겨우 23자루를 선별했다. 그리고 이수창이 추가로 5자루를 골라주자 모두 28자루를 포함시켰다.

이 같이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거치는 동안 10일에는 왜총 가운데 조선에서 만든 향총(鄕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대통관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왜총으로 100자루를 채울 수 없어 향총 중에서 품질이 우수한 것을 골라서 채우는 방안을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은 것이다. 향총을 왜총인 것처럼 자신들을 속이려 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30년 전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 조정에서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왜총을 수입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향총은 견고하지 못해 쉽게 파손되고 정교하지 않아 명중률도 낮다는 부정적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조총 선별 작업은 수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 무렵 청나라 대통관을 비롯한 사절들은 앞서 자신들이 퇴짜 놓은 조총 중에서 개인적으로 구입하여 선물용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흑심을 털어놓았다. 효종은 이들에게 돈을 받고 팔 수 없으니 그냥 내주라고 지시했다. 조선제 향조총을 몇 자루 넘겨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조총을 구매해 가는 일이 전례가 되면 앞으로도 빈번하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 청나라 사절단은 그동안 왜조총이냐 향조총이냐로 시비를 걸어 조정의 업무를 마비시키다시피 하면서 조선을 괴롭혔다. 그러면서 조선이 돈을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는 동시에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꼼수였던 것이다.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1897.11, 네이버블로그)

14일이 되자 모든 칙사가 모화관(慕華館)에 모여 그동안 선별한 118자루로 다시 시험 사격을 실시한 후 91자루를 골랐다. 당시 조선 조정은 향총 중에 왜총이 포함된 경우는 별 문제될 것이 없으나 왜총 중에 향총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북경에서 알면 차후에 반드시 큰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했다. 왜총으로 분류된 60자루 이외에 31자루는 왜총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나머지 9자루는 어차피 왜총으로 채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향총 20자루를 들여보내 시험 사격 후에 9자루를 고르도록 했다.

옛터에 복원된 독립관 전면(네이버블로그)

한편 이들은 퇴짜 놓은 조총 가운데 비교적 품질이 좋은 12자루를 칙사 이하 수행원들이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효종이 돈을 받지 말고 그냥 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칙사 3사람이 각각 1자루씩 갖고, 대통관 이몽선(李夢善)·김거군(金巨軍)·김삼달(金三達)이 각각 3자루씩 나누어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각 총에 필요한 남라개(南羅介) 등 부수 장비들도 함께 갖추어주었다. 그런데 차지아역(次知衙譯) 장효례(張孝禮)도 은근히 욕심을 내는 눈치를 보였다. 결국 대통관에게 준 것보다 아래 등급의 조총 2자루를 부수 장비와 함께 넘겨주었다. 모두 14자루를 추가로 전달한 셈인데, 아마도 칙사들은 통사들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챙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대외정벌》376~381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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