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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는 청군의 속셈
러시아 원정대가 탄 전선은 조선군이 청군과 함께 타고 간 대형 화피선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개선한 직후에는 상세한 내용이 보이지 않다가 이듬해(1655) 4월 23일 효종이 참석한 가운데 사령관 변급이 구두로 보고한 것이 가장 자세하다.
당시 변급은 윤대 무신(輪對武臣)으로서 주강(晝講)에 참석했다. 주강은 4품 이상의 무신이 매일 교대로 회의에 참석하여 혹시 있을 국왕의 질문에 대비하는 제도인데, 마침 변급의 차례가 되자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참석한 가운데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시구(鳲鳩)〉편을 강독하는 절차가 끝나자 변급이 직접 보고했다. 효종이 추가 질문을 하고 다시 변급이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이때 보고 내용의 줄거리는 이러했다. 변급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청군 측에서 제공한 소형 화피선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적과 마주치자 청군 사령관이 조선군 조총수를 선봉에 세우려고 했다. 작전 지휘권이 청군 사령관에게 있었으니 청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조선군을 총알받이로 세우려 한 것으로 보인다. 전공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선봉에 서려고 다투는 경우와 대비되는 상황이다.
조선군 사령관의 기민한 현장 대응
조선군의 작전 지휘권은 청군 사령관에게 넘어가 있었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변급은 청군 측의 무리한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어찌 이 자피선을 타고 저들의 큰 배를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항변하면서 선봉 부대를 바꾸도록 요구했다. 조선군 조총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상급 지휘관 사르후다도 변급의 건의를 무조건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사르후다는 와르카 부족 군사 300명과 청군 300명을 동원하여 조선군 포수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강변의 가장 높은 언덕에 버드나무로 위장 진지를 구축한 후에 그 속에 조선군 포수가 숨어서 사격하도록 계획을 변경했다. 매우 신속하게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비교적 안전한 곳에 은신한 채 저격수처럼 사격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군은 4월 28일부터 러시아 원정대를 상대로 작전을 벌였다. 27일 조우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접전한 지역이 어딘지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사령관 변급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러시아 원정대는 이미 쑹화 강에 진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급은 러시아 함선 형태를 효종에게 보고하면서 대선 13척은 각각 300석(石)을 적재할 정도의 규모며, 소선은 26척인데 왜선(倭船)과 비슷하다고 했다.
대선에 300석을 적재한다면 1석(섬)이 10말이므로 3,000말을 적재하는 크기다. 부피 단위인 리터로 환산하면 5만 4,000리터나 54제곱미터를 약간 넘는 규모다. 오늘날 철선과 같이 톤수로 환산할 수는 없으나, 당시 러시아 원정대원은 40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청군의 선박에 비해서는 다소 규모가 크고 공간적 여유도 넉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박의 몸체가 비록 크지만 노가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풍력을 이용하는 범선이었을 것이다.
쑹화 강이 헤이룽 강과 합류하는 하류 부근에서 쑹화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러시아 원정대가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조선군 조총수들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준 사격을 가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조총은 이른바 화승총(火繩銃)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왜군의 조총(鳥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총구로 화약과 탄환을 밀어 넣고 장전한 후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이 화약에 불을 붙여 폭발하는 힘으로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이다. 사격 후에 다시 장전하여 발사할 때까지 속도는 조총수의 숙련도에 따라 큰 차이가 났다. 사수가 얼마나 훈련하여 숙달되었느냐에 따라 발사 속도와 명중률에서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발사조(發射組)와 장전조(裝塡組)로 각각 몇 개 제대씩 구분하여 순환 교대 사격이 신속히 이루어지도록 반복 숙달 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조선군 100명은 이 같은 훈련에 숙달된 병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와르카의 군사 300여 명은 총소리에 귀를 막고 엎드리는 등 극심한 공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들은 화약무기와 접촉한 경험이 없는 군사들로서 재래식 무기인 창이나 칼로 무장한 지역 민병대 정도로 추정된다.
러시아 원정대는 강 언덕에 구축된 버드나무 진지에서 발사하는 조선군 조총수의 조준 사격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러시아 원정대가 먼저 탄약 부족에 직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탄약을 빨리 소모한 것은 지상과 언덕에서 사격하는 조선군과 청군에 각각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 원정대는 한동안 강물 흐름에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쑹화 강이 헤이룽 강과 합류하는 지역에 이르자 반격을 시도할 듯하다가 마침 동풍이 불자 돛을 올리고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당시 러시아 원정대는 큰 전선 여러 척에 나누어 탔으나 총인원이 4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비록 대포와 개인 화기로 무장했어도 탄약이 떨어지자 더 이상 열세를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탄약이 없는 총기는 몽둥이보다 못했다. 뿐만 아니라 언덕 위 버드나무 진지에서 굽어보면서 조준 사격을 가하는 조선군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었다. 이에 러시아 원정대는 일방적으로 사격을 당하여 사상자만 늘어남에 따라 아예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원정대가 전장을 빠져나가자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추격전에 나섰다. 무려 100여 리를 뒤쫓아 거리가 좁혀지자 선상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날이 저물어 추격을 중지한 채 강변에 임시 정박하고 밤을 새웠다.
이튿날인 5월 3일에 다시 90여 리를 추격했고, 4일에도 120여 리를 추격했다. 그리고 5일에 러시아 원정대를 발견했다. 조선군과 청군은 그들이 강상에 있는 섬의 숲 속에 매복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섬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접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것이 조선군 사령관 변급의 보고를 중심으로 정리한 원정작전의 내용이다. 결국 러시아 원정대는 그들의 요새가 있는 헤이룽 강 상류 지역으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청군과 함께 5월 6일부터 7일까지 헤이룽 강 가운데 작은 섬에 토성(土城)을 쌓았다. 높이가 3장(丈, 1장은 약 3미터)이니 약 9미터에 이르고, 둘레는 5리(里, 1리 약400미터)니 약 2킬로미터 정도의 규모다. 장차 유사시 작전용으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나. 항상 일정한 병력을 배치하지 않은 토성이라 적이 먼저 점령하여 이용할 수도 있어서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그런 다음 10여 일 동안 준비하여 5월 16일 헤이룽 강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6월 13일 닝구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쑹화 강과 무단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데 약 1개월을 소요한 것이다. 이는 휴식과 보급을 위해 지체했기 때문이다.
조선군 출병부대 사령관 변급은 청군과 함께 러시아 원정대 축출 작전에 참가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종료하고 6월 13일 닝구타에 이르자 비로소 조정에 결과 보고를 올렸다. 연락병은 회령으로 달려가서 개선 소식을 전달했다. 변급의 보고서를 휴대한 파발이 조정에 도착한 것은 7월 2일이었다. 장계의 내용은 “북우후 변급이 청병과 함께 나선을 격파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영고탑으로 귀환했다”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변급이 지휘한 1차 출정부대는 전원이 무사히 개선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보고서가 전달되는데 보름 이상 걸렸으니《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라 회령에서 한양에 이르는 1,921리 길을 파발마가 하루 평균 120∼130리를 달려 전달한 셈이다.
7월 3일 아침 효종은 나선정벌군이 개선한 사실을 조정에 공포했다. 그리고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사령관 변급을 특진시키고, 출정 군사들에게도 계급에 따른 포상을 내렸다. 일반 군사에게는 거주지에서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가족들에게 쌀과 베를 지급해주도록 했다. 변급은 생몰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655년(효종6) 국왕 경호부대의 금군(禁軍) 별장, 1656년 전남 수군절도사를 거쳐 1660년(현종 1) 충홍(忠洪, 충주+홍주)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근무했다. 출정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했는데도 불구하고 변급이 남긴 관련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 것은 매우 아쉬움 점이다.
이와 같이 조선군 출정부대 150여 명은 쑹화 강과 헤이룽 강 일대에서 청군과 함께 러시아 원정대에 큰 타격을 가하고, 그들을 헤이룽 강 상류 쪽으로 축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8월 3일 개선한 이들의 보고를 통해 ‘나선’이 아주 멀리 떨어진 서양의 어느 나라일 것이라는 사실 또한 비로소 조선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의 대외정벌》366~372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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