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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참전 현황
조선의 나선정벌 참전은 청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그동안 북벌을 위해 비밀리에 양성해 온 조선군의 전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묘·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힘들여 양성한 군사력을 오히려 적국을 지원하는데 투입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함경도 북병영(北兵營)의 병마우후(兵馬虞候)인 변급(邊岌)을 출병부대 사령관으로 선임한 것이다. 오늘날 변급에 대해 전하는 기록은 매우 적다.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이 기록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1628년(인조 6) 8월 17일 별시(別試) 무과 초시에 시험 감독관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변급은 다른 5명의 감독관과 함께 제2 고사장에 배치되어 무과 시험을 감독하였는데, 그해 8월 28일 알성시(謁聖試) 무과에 제1 고사장 감독관으로 참여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1630년(인조 8) 5월 11일 기사에는 어영청 파총(把摠)으로 활동한 경력도 나와 있다. 그러나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행적을 알 수 없다.
당시 함경도는 행정구역이 남도와 북도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본영은 북청(北靑)의 남병영(南兵營)과 경성(鏡城)의 북병영(北兵營)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종2품 병마절도사(약칭 兵使)가 중앙에서 부임하여 지휘했다. 북병영의 경우는 두만강이 결빙하기 시작하는 음력 10월부터 해빙하는 이듬해 3월까지는 북쪽으로 전진 배치하여 행영(行營)을 운영했다. 이곳은 지명으로 굳어져서 오늘날 ‘행영’으로 불리기도 한다.
남병사와 북병사는 정2품 함경도 관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함경도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관찰사가 겸직하는 병마절도사와 남병사, 북병사가 각각 임명되었기 때문에 함경도의 병마절도사 보직은 모두 3자리였다. 그리고 남병영과 북병영에는 종3품 무관직인 병마우후가 각각 1명씩 배치되었다. 당시 북도 병마절도사 정익은 전년도 11월 26일 효종의 지명을 받고 부임했다. 그 휘하에 있던 병마우후 변급이 9개 관할 지역에서 지원한 병력 중에서 선발한 100명의 조총수를 포함한 152명을 이끌고 나선정벌에 출병하게 된 것이다.(《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변어전고' 홍찬유 역, 민족문화추진회, 1967, 376쪽)
《제1차 나선정벌군 편성》
임 무 | 인원수 | 참전인원/선발지역 |
영 장(領 將) | 1 | 변급(邊岌) : 함경도 북병영 병마우후, 경성(鏡城) |
초 관(哨 官) | 1 | |
군 관(軍 官) | 2 | |
소통사(小通事) | 2 | |
기 수 | 4 | |
조총수(鳥銃手) | 100 |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회령(會寧), 종성(鐘城), 경원(慶源), 온성(穩城), 경흥(慶興) |
화 정(火 丁) | 20 | |
고 수 | 22 | |
계 | 152 |
제1차 나선 정벌군의 출병 현황을 사령관 변급의 보고를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데, 정벌군을 지휘했던 변급의 보고는 《효종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은 귀국 직후가 아닌 이듬해(1655) 4월 23일 이어서 이미 1년 정도가 경과한 후였다. 귀국 직후에 별도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효종에게 올렸을 것이나 그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1년여 만에 보고한 《효종실록》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여 이것으로 전말을 파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제2차 나선정벌군을 지휘한 신유(申瀏)가 작전일지를 기록하여 후세에 《북정록(北征錄)》혹은 《북정일기(北征日記)》로 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라서 더욱 아쉽다.
조선 육군 두만강을 넘어서
조선군 출병부대는 1654년(효종 5, 청 세조 순치 11) 3월 26일 함경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도하하여 장도에 올랐다. 이들은 두만강 대안의 화룡(和龍, 지린 성 허룽 시)에 도착한 후 연길(延吉, 지린 성 옌지 시 국자가)-왕청(汪淸, 지린 성 왕칭 현 백초구)을 거쳐 강행군으로 8일 만에 닝구타(寧古塔)에 도착하여 비로소 청군 1,000여 명과 합류했다.
이때부터 조선군 출정부대의 지휘권이 청군 사령관인 닝구타 암반장진 사르후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양국 출병부대 간 지휘권 이양에 따른 특별한 의식이나 문서 교환 등의 절차를 거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1637년 1월 청과 강제로 체결한 정축화약에 의해 양국 관계가 ‘군신관계’로 재설정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청군 사령관 사르후다의 작전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사르후다가 지휘하는 청군에는 만주족은 물론 그들의 지배를 받는 한족(漢族) 군사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1차 나선 정벌에는 조선군을 포함하여 3개 이상 민족 군사가 동원되고, 도중에 와르카(曰哈, Warka) 부족의 군사도 참가하게 되므로 이른바 다민족군(多民族軍)이 참전한 셈이다.
당시 닝구타는 목책(木柵)을 중심으로 안팎에 모두 300여 호 주민이 거주하는 거점도시였다. 닝구타에서 청군과 합류한 후 무단 강에 이르기까지 육로로 행군한 거리를 100리 정도였다. 와르카 강 또는 후르카 강으로 불리는 무단 강에서는 화피선(樺皮船)을 타고 하류로 내려갔다. 자작나무로 만든 화피선은 청군이 동원한 선박인데, 변급 사령관은 효종에게 자피선(者皮船)이라고 보고했다. 화피선과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현장에서 귀에 들리는 대로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형 화피선은 140척으로 각각 4〜5명이 탔고 대선은 20척으로 각각 17명이 탔다. 승선 인원으로 환산해 보면 조선군과 명군 총병력은 1,000여 명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화피선을 타고 다시 100리를 내려가 쑹화 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이란(依蘭, 하얼빈 시 이란 현)에 도착했다. 쑹화 강은 여진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강물’이라는 뜻으로 ‘쑹가리우라(松阿里烏拉)’라고 부르던 강이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란은 삼성(三姓)으로도 불리며 이 지역을 끼고 흐르는 오도린(斡朶憐) 하천 부근은 여진족 오도리 부족의 근거지다. 여진족은 자신들의 주근거지로 삼던 하천 이름을 따서 부족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란에서 다시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100리 정도 이동했는데, 이때부터는 주변 지세가 점점 평탄해지는 지형으로 항진했다. 이러한 지형은 5일 동안 계속될 정도로 넓었다. 이란을 출발하여 5일 만에 비로소 회통강(會通江)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강물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노 젓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 6일 만에 와르카 지경에 이르러 운라강(雲羅江)과 합류했다. 와르카는 왈가(曰可)·후르카(虎爾哈)·홀가(忽可, Furka, Hurha) 등으로 불리는 지명이며 동시에 토착 부족명이다. 이들 부족이 흩어져 사는 지역의 운라강은 회통강과 합류하므로 일명 후통 강(後通江, 厚通江)이라고도 불렀다. 후통 강(Ho-tong)은 혼동강(混同江, Hon tong)과 같이 쑹화 강의 또다른 이름이다.
조선군 사령관 변급은 닝구타에서 육로와 수로로 이동하여 와르카에 도착하는데 14일이 소요된 것으로 보고했다. 따라서 조선 국경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당시 조선의 거리 개념으로 2,400리가 되는 것으로 변급은 인식했다.
조선군과 청군은 4월 21일 와르카 지방에서 다시 배를 타고 후통 강(쑹화 강) 하류로 항진하여 27일 헤이룽 강 합류점 부근에서 비로소 러시아 원정대의 전선과 마주쳤다. 당시 러시아 원정대는 하바로프에게 지휘권을 승계한 스테파노프가 이끌고 있었다. 카자크 족 출신인 스테파노프는 1653년 헤이룽 강 중류 연안의 원주민 다우르 족 부락에서 겨울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1654) 봄에 원정대 370여 명을 이끌고 헤이룽 강 하류에서 중류로 거슬러 올라와 쑹화 강 하류로 진입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이 러시아 원정대와 조우하여 강상(江上)에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조선의 대외정벌》361~366쪽, 알마, 2015)
참고 : 조선의 나선 정벌군은 회령을 중심으로 북병영 관할지역 병사들로 편성되었고, 회령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등교육기관에서 사용하는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한 모든 연구물에는 수도 한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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