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고탑5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6】 제2차 나선 정벌-철수 문제. 2-2 언제 조선으로 돌아간단 말인가?조선군은 닝구타로 출발하지 못한 채 일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야영을 하면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후다가 청군 부상병들을 닝구타로 후송하도록 지시한 7월 8일 신류 사령관도 군관 유응천(柳應天)의 인솔 아래 중상을 입은 포수 15명과 화병 3명, 수솔(隨率) 2명을 닝구타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도록 했다. 나머지 군사들도 야영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소나기와 우박이 내리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일기불순마저 겹쳤다. 신류 또한 귓병이 악화되고 감기 몸살 증세도 나타났지만 주변에 의료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참을 수밖에 없었다. 7월 중순에 접어들자 식량 수급 대책이 더욱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20일.. 2024. 7. 30.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5】 제2차 나선 정벌-철수 문제. 2-1 청군의 귀국 보류 지시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작전 지역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1658년 6월 14일 날씨는 흐렸으나 동풍이 세차게 불어 쉽사리 쑹화 강 상류로 항진할 수 있었다. 15일에는 날씨가 화창하고 바람마저 잠잠했으나 상류로 갈수록 수량도 적어서 매우 느리게 항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청군 지휘부는 전투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16일에 북경의 중앙 정부로 발송했다. 이때 조선군의 인명 피해 상황을 전사자 8명과 부상자 25명으로 기록했는데, 청군과 차별하지 않고 1등부터 5등까지 다섯 단계로 세분하여 보고했다. 이날 보고서에서 청군의 인명 피해 상황도 처음 알려졌다. 육군 80여 명과 수군 3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에 러시아 원정대는 사령관 스테파노프를.. 2024. 7. 28.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7】 제1차 나선정벌 전투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는 청군의 속셈 러시아 원정대가 탄 전선은 조선군이 청군과 함께 타고 간 대형 화피선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개선한 직후에는 상세한 내용이 보이지 않다가 이듬해(1655) 4월 23일 효종이 참석한 가운데 사령관 변급이 구두로 보고한 것이 가장 자세하다. 당시 변급은 윤대 무신(輪對武臣)으로서 주강(晝講)에 참석했다. 주강은 4품 이상의 무신이 매일 교대로 회의에 참석하여 혹시 있을 국왕의 질문에 대비하는 제도인데, 마침 변급의 차례가 되자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참석한 가운데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시구(鳲鳩)〉편을 강독하는 절차가 끝나자 변급이 직접 보고했다. 효종이 추가 질문을 하고 다시 변급이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이때 보고 내용의 줄거리는.. 2024. 3. 27.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4】 출병계획 수립과 부대편성 영의정 정태화가 추천한 함경도 북병영 병마우후(兵馬虞侯) 변급(邊岌)이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한거원이 효종의 질문에 ‘북도의 수령이나 변장이 좋겠다’라고 대답한 대로 북도의 변장이 사령관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어 조정은 군무를 총괄하고 있던 비변사로 하여금 출병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15개 항목의〈함경북도포수영고탑입송절목(咸鏡北道砲手寧古塔入送節目)〉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작성되었다. 1.포수(砲手) 100명은 북도의 사격 우수자 중에서 최고 정예 요원을 엄선하고, 각각 자장목(資裝木, 현역에 나가는 정군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군보〈軍保〉가 부담하는 목면) 15필씩 지급한다. 2.화병(火兵) 20명은 북도 군사 중에서 선발하여 보내며, 각각 자장목 15필씩 지급한다. 3.영장(領將) 1명에게 자장목.. 2024. 3. 6.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3】 청의 출병 요청과 제1차 출병 준비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 청나라 조정은 토벌군을 편성하면서 최신 화약 병기를 제압할 조선군 정예 조총수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긴급히 파견했다. 비변사(備邊司)는 청나라 역관(譯官) 한거원(韓巨源)이 청 세조의 칙서를 가지고 입국하고 있다는 사실을 1654(효종 5년) 1월 28일 국왕 효종에게 보고했다. 압록강 남안의 의주부(義州府) 부윤이 직속 상관인 평안도 관찰사(감사)에게 보고한 상황이다. 한편 한거원을 청에 귀화한 조선인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으나, 《승정원일기》인조 22년(1644) 4월 30일 기록에 친동생 한명철(韓明哲)이 평안도 창주(昌州)에서 80세를 바라보는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했으니 조선인이 분명해 보인다. 한거원이 조선에 입국하는 목적은 당시 평안 감사인 허적(許積)이 사절단을 .. 2024. 2. 28.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