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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1866) 이후로 형성된 반서구적 분위기에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해준 사건이 있었다.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저지른 남연군 묘소 도굴사건이다. 성리학의 사상체계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조상의 유택이 서양 도굴꾼에게 파헤쳐진 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금상의 조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친 파렴치범과 그가 속한 국가를 동일시하여 금수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서구 세력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미국 함대의 일방적인 통상 요구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남연군 묘 도굴사건 이후로 불과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함대가 조선 해역으로 들어와 통상을 강요하는 행위는 앞서 조선이 체험했던 파렴치한 서구 세력과 동일하게 인식되어 조선의 복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미국 함대의 강력한 무력 앞에 조선군이 타격을 입기는 했으나 침략세력이 전투 직후에 스스로 철수했기 때문에 조선은 자력으로 물리쳤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미군 상륙부대가 광성보에서 철수한 사실을 6월 12일 확인한 후 조정은 국왕 교서를 통해 강력한 결의를 내외에 천명했다. 1866년 병인양요 이후로 추진해 오던 척화비 건립 작업이 탄력을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를 맺는 것이며,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주문과 같은 ‘척화비’를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교통 요지에 세워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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