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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 천총 양헌수 군은 1866년 10월 17일 아침 10시 양화진을 떠났다. 18일 해질 무렵에야 통진에 도착했다. 이어 순무 중군 이용희의 본대도 합류했다. 그러나 강화도로 건너갈 선박이 없으니 통진에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0월 19일 아침 별무사 지홍관이 양헌수가 직접 작성한 격문을 가지고 갑곶나루 대안으로 건너가 로즈 사령관에게 전달했다. 이때 프랑스군측도 조선 조정이 선교사를 처형한 행위를 질책하고, 수호조약 체결을 요구해 왔다.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교섭이 결렬되었다.
한편 순무 천총 양헌수는 별무사 지홍관을 파견한 후 통진부 뒷산(△160)에 올라가 정찰을 실시했다. 주요 지역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정찰병을 민간인으로 변장시켜 강화도에 침투시켰다. 한편 조정에서는 10월 21일 봉상시 봉사 한성근을 순무 초관에 임명하여 광주 별파진 50명과 함께 문수산성에 투입했다.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 잠복할 무렵인 24일 강화도의 프랑스군도 조선군의 대응태세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리델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이 제공한 조선 조정의 의병 모집 상황, 무기 보유 및 제조에 관한 상황, 해안 및 한강 연안의 조선군 배치상황 등에 관한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정찰대 70여 명을 10월 26일 아침 7시경 갑곶나루 건너편 문수산성으로 급파했다.
조선군은 프랑스군 정찰대가 문수산성 나루에 접안할 때 일제 사격을 가했다. 적의 방어태세가 가장 취약한 시점에 사격한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군 정찰대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프랑스군이 문수산성 남문으로 쳐들어오자 화력이 열세인 조선군은 문수산 동북쪽 산록을 넘어 통진 방면으로 퇴각했고, 작전은 종료되었다.
문수산성 전투는 조선군이 기습 공격을 승리로 연결시키지 못한 채 패퇴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끝났다. 프랑스군은 잠시 동안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있다가 곧바로 본대로 돌아갔다. 당시 프랑스군도 사상자가 5명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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