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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양척왜2

격동의 19세기 조선(24:끝) - 실권자 흥선대원군 하야 1866년 병인사옥 이후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면서 조선 조정의 대외정책은 강경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따라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는 재야 유림세력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급기야는 조정의 또 다른 강경세력과 제휴함으로써 자신들의 강화된 발언권으로 새로운 목표를 추구해나갔다. 1873년 윤 6월 성균관 유생 이세우 등이 흥성대원군에게 ‘대노(大老)’의 존호를 올리자고 상소했다. 그러나 11월 이항로의 제자인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로 맞불을 질렀다. 재야 유림세력은 앞서 1865년(고종 2) 철폐된 ‘만동묘’를 복원하도록 주장하여 조정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1874년 7월 만동묘를 중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1592) 때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하여 도.. 2023. 7. 15.
격동의 19세기 조선(23) - 조선의 강경세력 득세 조선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서구 열강의 침략세력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자구적 논리가 ‘위정척사’였다. 그 행동 방략이 ‘척양’과 ‘척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페르트가 1880년 저술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에서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절박한 위기에서 쉽사리 벗어나게 되자 자신들도 놀랄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 말이 당시 조선 지도층의 인식을 잘 대변해 준다. 이는 곧 자부심으로 연결되었고, 서구 세력에 대한 강경정책으로 나타났다. 조선은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을 복고한 후 국교 재개를 요청했을 때 국서에 찍힌 도장의 형식이 이전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해 버렸다. 1870년 6월 초 독일 군함 헤르타(Her..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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