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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란(삼성)3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7】 제2차 나선 정벌-나선정벌이 남긴 것.(끝) 경제 사정 악화와 변방 안정 대책비록 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 나선정벌은 당시 북벌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국왕 효종이 실전을 통해 조선군의 전투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적극적인 북벌 준비가 없었더라면 출병 요청을 거절할 구실이 생겼을 것이며, 현실성 부족한 북벌정책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 것이라는 최근 연구자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조선군 출병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만주 지역으로 들어간 후에 사간원(司諫院)에서는 변방 지역 주민의 생활안정과 국방력 강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다. 제1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제2차 출정 역시 함경도에서 추진된 실정을 감안하여 함경도 지역 주민의 생활 안정과 방위력 증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함경도가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 2024. 8. 1.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6】 제2차 나선 정벌-철수 문제. 2-2 언제 조선으로 돌아간단 말인가?조선군은 닝구타로 출발하지 못한 채 일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야영을 하면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후다가 청군 부상병들을 닝구타로 후송하도록 지시한 7월 8일 신류 사령관도 군관 유응천(柳應天)의 인솔 아래 중상을 입은 포수 15명과 화병 3명, 수솔(隨率) 2명을 닝구타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도록 했다. 나머지 군사들도 야영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소나기와 우박이 내리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일기불순마저 겹쳤다. 신류 또한 귓병이 악화되고 감기 몸살 증세도 나타났지만 주변에 의료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참을 수밖에 없었다. 7월 중순에 접어들자 식량 수급 대책이 더욱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20일.. 2024. 7. 30.
17세기 조선 육군, 나선(러시아) 정벌에 출병.【15】 제2차 나선 정벌-철수 문제. 2-1 청군의 귀국 보류 지시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작전 지역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1658년 6월 14일 날씨는 흐렸으나 동풍이 세차게 불어 쉽사리 쑹화 강 상류로 항진할 수 있었다. 15일에는 날씨가 화창하고 바람마저 잠잠했으나 상류로 갈수록 수량도 적어서 매우 느리게 항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청군 지휘부는 전투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16일에 북경의 중앙 정부로 발송했다. 이때 조선군의 인명 피해 상황을 전사자 8명과 부상자 25명으로 기록했는데, 청군과 차별하지 않고 1등부터 5등까지 다섯 단계로 세분하여 보고했다. 이날 보고서에서 청군의 인명 피해 상황도 처음 알려졌다. 육군 80여 명과 수군 3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에 러시아 원정대는 사령관 스테파노프를..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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