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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2

한국의 성곽 공방전 7-7. 西歐 列强의 침입과 강화도 공방전(1866·1871) 유럽제국이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하고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리자 노대국 청나라도 열강의 상품 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전락했다. 뒤이어 일본도 개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동양 삼국 중에서 오직 조선만이 쇄국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으로 ‘양요(洋擾)’가 발생하게 되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와 한강 수로의 입구를 봉쇄하면서 야기된 무력 충돌사건이다. 이해 정월,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되자, 리델은 텐진(天津)으로 탈출하여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극동함대가 1866년 9월 정찰을 마치고, 10월 군함 7척으로 재침하였다. .. 2024. 1. 10.
격동의 19세기 조선(22) - 조선의 서구 세력에 대한 인식 변화(2-2) 병인양요(1866) 이후로 형성된 반서구적 분위기에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해준 사건이 있었다.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저지른 남연군 묘소 도굴사건이다. 성리학의 사상체계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조상의 유택이 서양 도굴꾼에게 파헤쳐진 사건은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금상의 조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친 파렴치범과 그가 속한 국가를 동일시하여 금수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서구 세력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미국 함대의 일방적인 통상 요구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남연군 묘 도굴사건 이후로 불과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함대가 조선 해역으로 들어와 통상을 강요하는 행위는 앞서 조선이 체험했던 파렴치한 서구 세력과 동일하게 인식되어 조선의 복수심을 자극하기..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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